필리핀 팔라완의 지하강-2000만년 성상을 뚫고

입력 2013-06-20 19:21:42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지하강. 스포츠동아DB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라/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볼 시간이/없을 정도로/바쁘게 살고 있지 않은가?/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라/가던 길을 멈추고 노을 진 석양을 바라보며/감탄하기에/가장 적당한 순간은/그럴 시간이 없다고/생각되는 그때이다’. 어니 젤렌스키의 말이 요즘 들어 가슴에 와 닿는다. 쉼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 난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가. 섬이 그리워졌다. 푸른 바다가 보고 싶었다. 느림을 느끼고 싶었다. 그 무렵 필리핀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팔라완. 낯선 곳이었다. 지도를 뒤져보니 마닐라 밑에 수세미를 닮은 커다란 섬이었다. ‘필리핀의 미개척지. 때 묻지 않은 곳. 울창한 밀림’. 이런 정보들이 떴다. 맘에 들었다. 배낭을 꾸렸다. 목적지는 필리핀 팔라완의 푸에르토 프린세사. 그곳엔 세계 7대 자연경관의 하나인 ‘지하강(Underground River)'이 있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세계인들의 이목을 빼앗았을까. 가는 길은 녹록치 않다. 한국인 가이드도 없다. 그래 부딪혀보자. 길이 없는 곳을 찾아 가는 게 여행이라 하지 않았던가.


● 세계 7대 자연경관의 하나인 ‘지하강’…거대한 자연 앞에 주눅 들다

팔라완의 푸에르토 프린세사 여행 백미는 ‘지하강’. 지하강을 가기 위해선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차로 2시간을 가야한다. 사방비치에 이르면 다시 이곳에서 배를 타고 20분 가량 더 들어가야 한다.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지하강. 길이가 약 8.2km에 달한다. 2000만 년 전에 생성된 일종의 석회암 동굴강이다. 지하강 투어는 보트를 타고 시작된다.

보트를 타고 동굴로 입구에 들어서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짹짹짹, 쭈잇쭈잇”. 동굴 앞엔 수 십 마리의 바다제비들이 할강훈련을 하듯 날아 다녔다. 동굴은 바다제비의 아파트였다. 가이드와 함께 배를 타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암흑세상이었다. 쉴 새 없이 제비가 지저귀고 동굴 천장엔 셀 수 없을 정도의 박쥐들이 거꾸로 매달린 채 곤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서서히 노를 저으며 랜턴으로 자연과 세월이 빚은 동굴의 속살을 비춰 주었다. 지하강 동굴은 석순과 종유석이 만든 자연박물관이다. 사자바위 껌바위 낙타바위 거북이 형상은 물론 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수직동굴도 있다. ‘지옥의 묵시록’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지경. 어떤 곳은 머리가 바위에 닿을 듯 낮아 허리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다. 변화무쌍한 속살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세인트폴(1028m)이라는 산의 내부를 물이 용식시켜 만든 것. 동굴은 산중턱에서 8km나 하단으로 연결돼 있고 그 끝은 바닷물과 맞닿아 있다. 아쉽게도 우리가 투어할 수 있는 곳은 약 1.5km 정도. 약 1시간 걸린다.

필리핀 전역을 여행 중이라는 스페인의 리콜은 “이런 거대한 동굴은 처음이다. 판타스틱하다”며 연신 감탄했다.

아참, 지하강이 아무리 좋더라도 입을 벌리며 천장을 쳐다보면 곤란하다. 천장에 붙어있는 박쥐의 배설물이 입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조심하시길.

ATV 정글 탐험. 스포츠동아DB



● 맹그로브 에코투어, 짚라인, ATV…“살아있네! 팔라완”

맹그로브를 아시나요? 그렇다. 열대와 아열대의 갯벌 혹은 하구서 자라는 생명의 나무.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 사방비치서 20여분 걸어가면 맹그로브 숲이 나온다. 맹그로브 숲 하구는 바다와 맞닿아 있고 육지 쪽으론 끝없는 맹그로브 숲이 펼쳐진다. 바다와 강은 달의 도움으로 하루 두 번 만난다. 밀물 땐 수백 여 미터 넓이까지 물이 들어온단다. 쪽배를 타고 숲으로 들어가니 사방이 고요하다, 적막하다. 아니 원시림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시끄럽다. 긴 뿌리를 갯벌에 박고 할퀼 듯 객을 맞는다. 목은 상쾌하다. ‘산소의 맛이 이런 거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도마뱀, 야생 원숭이, 부리새 등 희귀한 동식물들을 보는 것은 덤. 약 1시간에 걸친 쪽배 맹그로브 에코투어를 마치면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세계를 다녀온 듯하다.

사방비치로 가는 길에 ‘우공락 어드벤처’가 있다. 이곳에서 짚라인을 즐길 수 있다. 우공(Ugong)은 필리핀어로 속이 비었다는 뜻. 말 그대로 속이 빈 바위가 있는 곳. 실제로 바위를 두드리면 ‘통통’ 메아리 소리가 난다. 짚라인을 타기 위해선 바위산을 올라야 한다. 지구의 나이가 어렸을 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가 융기하면서 만들어진 우공락은 부처, 예수, 공룡, 코끼리 등 각양각색의 형상을 조각해 여행객들의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30분 정도 오르면 사방이 탁 트인 정상. 이곳이 짚라인 출발지. 쇠밧줄을 타고 100여 미터 내려오는 짚라인은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준다. 이스라엘서 왔다는 아디 양은 “짚라인을 타니 기분이 좋다. 처음엔 두려움을 느꼈는데 타고 나니 한번 더 타고 싶다”며 줄곧 “굿!”을 연발했다.

좀 더 액티브하게 즐기려면 ATV(All Terrain Vehicle·산악오토바이)로 정글 탐험을 하는 거도 한 방법. 조작 방법도 간단하다. 시동 스위치를 켜고 액셀러레이터 키만 조절하면 끝. 여자들도 쉽게 조작할 수 있다. 정글에 들어서면 끝없는 나무 숲에 가려 햇볕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다. 길이라도 좋다, 길이 아니라면 더 좋다. 좁게 난 길을 ATV로 부릉부릉. 진흙에도 빠져보고 경사진 길을 홀로 내려와 보라. 개울을 건너 길이 아니 숲 속을 헤치며 정글을 헤쳐 나가 보라. 삶의 활력이 생긴다. 1시간의 정글 탐험. 그 에너지로 1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쉐리단 리조트 수영장-전용 비치(아래). 스포츠동아DB



● ‘쉐리단 리조트’엔 특별한 스파가 있다

지하강이 위치한 사방비치 인근에서 럭셔리하게 묵으려면 ‘쉐리단 비치 리조트 앤 스파’가 엄지손가락으로 꼽힌다. 97개의 넓고 깨끗한 객실과 150미터나 되는 메인 수영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자체 전용비치도 갖추고 있다. 팔라완 유일의 5성급 리조트. 특히 객실과 객실 사이에 있는 빅풀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뚫린다. 오픈한 지 2년 밖에 안됐지만 유럽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스포츠바, 컨벤션센터, 낚시터 등 성인시설 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한 대형 체스장과 키즈클럽도 갖춰 가족 여행객들에겐 안성맞춤이다. 이밖에 리조트 자체에 서핑보드 카약 페달보트 세일링보트 등이 마련돼 다양한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뷔페로 입과 눈을 즐겁게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 해산물을 사용해 생선을 통째로 찌거나 튀긴 붉은 색의 라푸라푸(LapuLapu·다금바리)는 비린 내도 없고 쫄깃쫄깃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아기돼지를 대나무에 끼워 숯불 훈제로 구운 레천(Lechon)도 인기 메뉴. 육질이 바삭바삭해 소스와 곁들여 먹으면 혀가 놀랄 정도. 또한 필리핀식 잡채인 판싯도 놓치면 아까운 요리.

특히 이곳은 스파와 마사지가 유명하다. 스파를 받아보니 다른 곳과 차이점이 있었다. 태국 등 동남아국가의 스파가 온몸을 강하게 자극하는 ‘돌직구 스파’라면 이곳은 아로마테라피와 음악치유요법 등을 활용한 일종의 ‘힐링스파’. 먼저 머리와 가슴을 잔잔하게 갈아 앉히는 음악과 코를 자극하는 아로마향이 피로를 무장해제 시킨다. 그리곤 강하지만 아프지 않고 약하지만 시원하게 조물조물 마사지해 구석구석 숨은 피로를 몽당 빗자루로 쓸어 담듯 피로를 핥아 올린다. 한 번 스파 데스크에 오르면 1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머무는 동안 그 맛을 못 잊어 한 번 더 찾게 되는 마력이 있다.

여행은 버리기 위해 떠난다고 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자동차는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은 닦지 않았고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으나 제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 돈과 기계에 먹힌 지 오래다. 여행을 통해 많은 걸 버렸어도 여전히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어쩌랴 그런 중생인 것을. 내 삶의 버킷리스트가 하나 더 추가됐다. 팔라완에 가족 모두가 함께 와 휴가 즐기기. 아, 욕심만 자꾸 늘어간다.

푸에르토 프린세사(필리핀) l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PS
우기(雨期)라서 행복해요!


필리핀의 우기는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이미 장마철이 시작됐지요. 그렇다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비와 햇볕이 한 두 차례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일 뿐입니다. 비와 여행.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여행자에게 비는 불청객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때론 여행을 감미롭게 하는 조미료가 되기도 합니다.

리조트 풀장에서 물놀이를 즐길 때였습니다. 햇볕이 살갗을 구워 삼킬 듯 내려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치더군요. “와우!”. 순간 풀장의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곤 모두 개구쟁이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비 앞에선 어른도 아이도, 인종도 국적도 따로 없었습니다. 짧은 영어로 서로 인사도 하고 ‘하하호호’ 웃으며 “오, 해피!”를 외쳐댔습니다. 끼리끼리 놀았던 풀장은 비로 하나가 돼 물장난도 함께 하고 수구도 함께 즐기며 낯선 여행지에서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비는 서먹서먹했던 인간의 벽을 무너뜨려 친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주뼛주뼛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메이 알렉 리콜 아디…. 외국인 친구들, 고마워요. 당신들 덕분에 참 즐거웠습니다.

카약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잔잔했던 바다가 갑자기 어둠을 삼킨 듯 시커멓게 바뀌더니 거센 파도를 몰고 왔습니다. 우두둑 우두두둑. 비가 떨어졌습니다. 이내 빗방울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굵어졌습니다. 휘이청 휘청, 까딱 까딱. 파도가 카약의 옆구리를 때려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배도 삶도 심하게 흔들릴 땐 몸부림치지 말라. 그냥 파도에 몸을 맡겨라. 맞습니다. 저는 카약에 드러누워 비를 온 몸으로 맞이했습니다. 아니 그 롤링을 즐겼습니다. 얼굴에 내리치는 비가 따가웠습니다. 바람은 더 세차게 불었고 카약에 내리치는 빗방울은 음표가 되어 바다로 퍼져 나갔습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였습니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저도 모르게 김현식의 노래 ‘비처럼 음악처럼’을 흥얼거렸습니다. 거센 비는 그 넓은 바다에 벼락 치듯 내려 꽂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습니다. 아마 삶 또한 그렇게 비처럼 사라져 가겠지요. 지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는 저에게 ‘구루’였습니다.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