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팬 미팅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많은 분들이 오셨네요~.”

영화 ‘아버지의 전쟁’ 촬영 중인 배우 한석규는 인터뷰로 시간을 하루를 뺄 수 있었다. 또 이날 스칼렛 요한슨마저 기자회견을 하는 바람에 기자들이 오전부터 그와 인터뷰를 하러 모이기 시작했다. 첫 시간에 20명의 기자가 모여 한석규는 마이크를 들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는 “마이크 들고 인터뷰 하긴 또 처음이다”라며 웃으며 말했다.

먼저 ‘프리즌’을 보고 난 소감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선 객관적으로 못 본다”라며 “내 연기를 스스로 판단하려면 3년이 걸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저는 제 연기에 스스로 점수를 매겨요. 제 점수는 굉장히 짭니다. 하하. ‘상의원’이 3년이 지났다고요? 아하, 그러네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제 연기는 많이 줘봐야 60점인 것 같아요. 제일 훌륭한 점수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주고 싶네요. 한 80점? 그 영화는 개인적으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 포스티노’처럼 남아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전작들 중에도 저는 평생 보는 영화도 있고, 거들떠도 안 보는 영화도 있어요. 물론 그러면서 배운 게 많죠.”


● “처참한 수놈 하이에나의 삶 보며 ‘저거다’ 싶었다”

한석규는 ‘프리즌’에서 감옥 안에 절대제왕인 ‘익호’ 역을 맡았다. 익호는 감옥 안에서 세상 밖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 그리고 범죄까지 모든 것을 컨트롤 하고 심지어 감옥 안에 있는 교도관들까지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는 특별한 전사가 없이 등장해 신비감까지 갖고 있는 인물이다.

한석규가 시나리오를 통해 ‘익호’를 처음 접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이런 사람이겠구나’라는 판단을 했다고. 그는 “본능적으로 인식이 되는 캐릭터였다”라며 “그런데 ‘이 역이 왜 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구현하기 힘든 이미지라고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내가 입기는 힘든 옷 같았어요. 악역은 몇 번 했지만 그래서 악역에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말투가 사투리라서 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연기할 때 ‘사투리’는 외국어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내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죠. 그래서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제가 사투리를 사용하며 연기를 하는 데 공포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럼에도 ‘에라~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게 제 일이니까요.”

‘익호’ 캐릭터를 만들어가던 중 한석규는 전에 봤던 한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하이에나’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는 “그 세계가 참 비참하더만”이라며 “하이에나가 모계사회로 이뤄지는데 여왕 하이에나가 있더라. 그 여왕 하이에나에게 간택을 받지 못하면 다른 무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공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데 눈알이 하나 빠지고, 입도 다 찢어질 정도로 뜯겨나가더라.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 저게 익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캐릭터 하나 때문에 발버둥을 쳤다”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 “대사는 가장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현장에서는 김래원과 현장에서 만들어나간 것도 있었다. 한석규는 “현장마다 틀리긴 한데 이번 영화 현장은 상대방과 리허설을 하면 외워질 정도의 대사량이긴 했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그러면 큰일나죠. 하하. 정말 생방송처럼 진행이 되니까요. 그런데 영화 현장은 드라마 촬영장보다는 여유가 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죠. 대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또 중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해요. 우리가 본 영화 중에 대사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정말 어떤 작품은 결정적인 한 마디가 중요한 것이 있고, 또 다른 것은 전체적인 느낌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연기자들이 대사를 할 때 이걸 왜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대사를 외워서 뱉는 건 누구나 합니다. 장면에 따라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여러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요.”


● “연기 대결? 고흐랑 고갱을 비교하는 거랑 뭐가 달라”

배우 한석규는 자타공인 연기를 잘하는 배우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베테랑’ 연기자들과 함께 입에 오르고 내리며 그의 연기력에 대해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석규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중에 누가 더 그림을 잘 그리는지 묻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배우는 그 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기의 색이 있다. 너무 다 달라서 누가 더 잘하느냐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며 “이제는 그걸 좀 알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는 서울 종암동 토박이이고 만약 어떤 연기자는 울릉도에서 자랐다면 그 세계관은 완전히 다르죠. 말투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겠죠. 저는 서울 종암동에서 1970년대를 보냈고 막내로 자랐어요. 거기서 보고 느낀 것들이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제 과거가 제 연기생활에 한계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조건들이 절 완성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 저희는 다 남녀합반이었어요. 그 때는 선생님들이 다 몽둥이를 들고 다니셨죠.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 때는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게 1974년도라 가능했던 거죠. 그 때 태어난 것을 저는 부인할 수 없잖아요. 그런 경험들이 연기를 통해 또 다른 저를 완성시키는 거죠.”

그렇다면 한석규는 자신의 연기에 대해 얼마나 만족감을 느낄까. 그는 “이젠 좀 봐줄 만 한 것 같다”라고 웃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연기는 40세 때부터 시작이 되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제 모습 보면 ‘왜 저렇게 멍을 때리고 있냐’, ‘보기가 다 싫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연기가 기능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그 나이 때 겪게 되는 것도 무시하지 못했어요. 나이가 먹으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하다 보면 이제 ‘죽음’이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죠.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아마 내면에서 달라지는 것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계속 배우면서 연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배워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야죠.”


● “오랜 고민 끝 내린 결론, 연기자는 가짜로 진짜의 정곡을 찌르는 것”

1시간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연기자로서 갖고 있는 신념 등을 말한 한석규에게 고민 거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역시 배우로서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것도 수 년씩이나 말이다. 한석규는 “2002년 정도에 몸을 다친 적이 있었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게 몸과 정신은 연결돼 있더라”고 말했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좋은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어느 날 문득 ‘내가 하고 있는 게 다 가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그렇잖아요. 우리가 하는 연기는 다 가짜이잖아요. 거기서 밀려드는 허무감이라고나 할까? 내 연기도, 상대방 연기도 다 가짜니까 미치고 팔짝 뉠 노릇인 거지. 완전히 가짜 놀음인데 진짜 같이 해보자고 이러고 있으니. 그래서 무척 힘들었죠.”

그런데 지난해 출연했던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를 촬영하면서 이 가짜 놀음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이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직업이라는 게 뭔지도 생각해보고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은 뭘까’라고 계속 고민을 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20대부터 고민했던 그것을 이제야 한 문장으로 답을 내렸어요. 제가 하는 일은 가짜를 통해서 진짜의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요. 가끔 진짜의 이야기를 하면 이해를 못할 때가 있죠. 그것을 쉽게 다시 이야기 해주는 것이 연기자의 일인 것 같아요. 우리가 유식한 척을 연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역할은 보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쉽게 풀어주는 것이 절대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쉽고 정확하게 ‘진짜’의 모습을 ‘가짜’로 보여주는 것이 연기자들의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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