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토크①] 이외수 “노숙-가난 겪었어도 제일 힘든 건 외로움”

입력 2017-08-30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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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토크①] 이외수 “노숙-가난 겪었어도 제일 힘든 건 외로움”

소설가 이외수는 겉모습에서 풍겨져 나오는 도인(道人)같은 풍모와 별개로 끊임없이 속세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최근 작품인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를 비롯한 전작들에서 개인의 내면과 사회의 문제점을 녹여낸 이야기들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문인(文人)임 분명히 했다.

또한, 그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 활동을 통해 다소 민감한 정치적 발언들도 해왔다. 그리고 청년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소위 예술가라는 이들이 대중과 작품 이외의 방식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일정 부분 이외수 작가의 공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보는 늘 그를 비판하는 이들의 좋은 소재거리가 되어왔다. 작품에만 전념한다면 ‘대하기 어려운 소설가’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외수 작가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을 품고 화천 감성마을에서 이외수 작가와 만났다.


Q. 지난 40년 동안의 활동으로 이외수 문학관과 감성마을이 생겼다. 이만한 위업을 달성하기까지를 되돌아본다면?

A. 우선은 굉장한 과정이었다. 나는 속칭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대개 출신 학교가 어디냐에 따라 선후배끼리 도우면서 밀고 당기는 것도 있는 법인데 난 그런 도움을 못 받았다. 특히 문단에서의 선후배 관계는 전무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외롭고 그런 현실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에 ‘더 치열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노숙도 했고 가난도 겪었지만 그 중에서 제일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Q. 강박관념에 외로움까지 겪었다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했나.

A. 내 작품 중에 ‘겨울나기’라는 작품이 있다. 거기에는 한 청년이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해골 위에 노란 나비가 내려앉는 장면을 보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 작품이 나의 습작 시절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암담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다가 ‘들개’라는 작품은 내가 어떤 정신적 대들보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썼다. 거기에서는 예술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Q.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해야 할 일인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A. 평범하게 살고 싶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그래서 평범하게 살고자 취업도 하려고 했다. 지방지 기자도 했고 삽화도 그려봤다, 심지어는 가게를 내고 도장 공부 인쇄물 사업도 해보고 학원 선생도 해봤다. 젊을 때 구두닦이부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도 예술은 내게 마약 같았다. 안하면 금단현상이 생기더라. 예술을 하지 않는 나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Q. 금방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늘 예술가들은 ‘결핍’ 이야기를 한다. 당신에게서 가장 결핍된 부분은 뭔가.

A. 내가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모성에 대한 결핍이 가장 심했다. 그것은 내 평생의 끊임없는 목마름이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나중에 아버님이 재혼 하셨고 새 어머니도 나에게 정말 잘해주셨는데도 그 모성에 대한 갈구는 사라지지 않더라. 마치 늑골 하나가 빠져나간 느낌이다.


Q. 그런 결핍을 안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A. 사회적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과거 내 별명이 춘천 거지였다. 노숙도 하고 구걸도 하면서 살았던 그 당시에도 나는 애정 결핍이 심했다. 누구를 사귀려고 하면 내 조건은 다 불충분 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렸는데 나를 허언증 환자 취급을 받곤 했다.

→ ②편에서 계속

동아닷컴 곽현수 기자 abroa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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