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범수가 영화 ‘출국’을 선택한 배경에는 시나리오와 캐릭터, 그리고 진한 부성애가 가장 크게 차지했다. 실제로 두 아이의 아빠라서 더욱 그랬다. 그는 “흠잡을 데 없다면 건방진 말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영화”라고 했다. 사진제공|디씨드
아빠가 되니 아빠의 마음 알게 돼
참전용사 아버지, 늘 의연하셨죠
영화 속 영민도 위로해주고 싶어
신인 감독이지만 만듦새가 대단
화이트리스트? 부당함은 없어야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하나 둘씩 낳으면 누구나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는 과정은 ‘배우’라고 해서 예외일 순 없다. 딸과 아들을 둔 이범수(48)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되고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실감한다는 그가 새로 내놓는 영화에서도 절절한 부성애를 그린다.
영화 ‘출국’(감독 노규엽·제작 디씨드)의 개봉에 앞서 만난 이범수는 한 시간 남짓한 대화의 대부분을 온통 부성애 이야기로 채웠다. 아버지가 된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해 작고한 부친에 대한 추억도 하나둘씩 풀어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되고나니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는 그는 “아버지들의 사랑이야말로 곧바로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다가오는 것 같다”고 했다.
● ‘출국’…1986년 월북 학자와 가족의 이별 실화 바탕
이범수가 영화에 참여하기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2년만이다. 앞서 2014년 영화 ‘신의 한 수’의 성공, 비슷한 시기 드라마 ‘아이리스2’ 등을 통해 강렬한 인상의 악역을 맡아 활약한 그가 자신에 주어지는 비슷한 캐릭터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들 무렵 ‘출국’의 시나리오가 주어졌다. 신인감독이 연출하고 신생 제작사가 기획한 작품이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대부분의 촬영이 폴란드에서 이뤄졌다. 해외 촬영은 어느 곳이든 쉽지 않다. 그런 현장에서 신인감독이 여러 난항을 극복하는 걸 가까이 지켜봤다. 진정 어린 마음이 들더라. 하루 정도의 오차를 제외하고, 계획대로 두 달간의 일정을 문제없이 마치면서 성취감이 컸다. 흠잡을 데 없는 영화라면 건방진 말일 수 있지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영화 ‘출국’에서의 이범수. 사진제공|디씨드
14일 개봉하는 ‘출국’은 1986년 독일 베를린이 배경이다. 가족을 위해 월북했던 경제학자 영민(이범수)이 이내 북한의 실상을 깨닫고 다시 탈출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헤어진 영민은 북에 납치된 아내와 두 딸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이와 함께 남과 북, 미국 정보국의 이념 갈등도 이야기의 한 축이다.
영화는 실화 소재다. 두 딸과 아내가 북한에 납치된 뒤 송환운동을 벌인 오길남 박사의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물론 주요 설정만 닮았을 뿐 이야기는 대부분 허구로 채워졌다.
이범수 역시 “영화를 고를 땐 오직 시나리오와 캐릭터만 볼 뿐”이라며 “실화인지, 원작인 소설이 있는지는 내게 중요치 않았다”고 했다. 정작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부성애다.
“만약 내가 가정을 이루기 전 ‘출국’을 접했다면 와 닿는 부분이 적었을지 모른다. 실제 두 아이의 아빠이다 보니 당연하게도 그런 감정이 먼저 온다. 영민의 사연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인간 대 인간으로 위로해주고,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 “나의 아버지, 무뚝뚝하고 투박한 분”
아버지를 그리다보니 지금은 세상에 없는 부친을 떠올리는 날도 잦았다. 이범수의 부친은 한국전쟁 참전용사. “그 시대 참전하지 않은 젊은이를 찾는 일이 오히려 어려울 것 같지 않느냐”고 차분하게 반문한 그는 “굉장히 고지식한 분이었다”고 돌이켰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고 나서 아버지께 ‘체한 것 같아요’라고 하니 ‘동네 한 바퀴 뛰고 와’ 그러시더라. 어떤 날은 ‘머리가 아파요’ 하니까, 또 ‘동네 뛰고 와’ 하신다. 하하! 늘, 일단 뛰고 오라고. 그러면 나는 또 뭔가 아버지만의 방법이 있나보다 하고 동네를 뛰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뚝뚝하고 투박한 분이었다.”
그 땐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마음은 두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초등학생인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고나니, 감히 그 때 아버지 마음이 하나씩 이해가 된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안절부절 못하면 안 되니까. 흙 묻으면 묻은 대로 털고 다시 가면 되는 거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게, 의연한 자식을 (아버지께서)의도하신 거다.”
영화 ‘출국’에서의 이범수. 사진제공|디씨드
덕분에 이범수에게 ‘출국’은 더 각별하다. “흥미 위주의 것들이 넘치는 요즘, 나에겐 마치 피천득의 ‘인연’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며 “우리 시대의 가족 그리고 아버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어서 선택하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고 했다.
영화를 향해 일부에서 제기되는 시선에 대해서도 그는 진솔하게 답했다. 전 정권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수혜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에 관한 답변이다. 제작진은 먼저 “(의혹의)상당 부분은 오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영화 후반작업 도중 관련한 소식을 접했다는 이범수는 “어떤 형태로든 부당하게, 누군가 이득을 보고 다른 쪽은 피해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출연료 30만원을 받던 때부터 뚜벅뚜벅 여기까지 걸어온 나의 삶도 돌아보는 기회가 됐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 이범수는 제작자로도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자전거 영웅 엄복동의 이야기인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을 제작해 내년에 내놓는다.
“어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한 가지나 똑바로 하라’고.(웃음) 몇 가지 일을 하는듯 보여도 사실 영화라는 하나의 일 안에 포함된 작업들이다. 오직 영화를 위해 순수하게 모인 이들이 함께 작업하고, 완성한 걸 다 같이 보는 과정이다. 영화는 해도 해도 재미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