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김태영부터 정태욱까지…마스크에 깃든 부상 투혼

입력 2019-05-2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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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출전한 수비수 김태영의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6강 이탈리아전 전반 9분경 복서 출신의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밀착 마크하다가 그의 왼팔에 일격을 당한 순간, 김태영은 얼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는 밀려오는 고통과 함께 계속해서 코뼈를 만지작거렸고, 만질 때마다 피가 쏟아졌다. 누가 봐도 코뼈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들것에 실려나간 김태영은 잠시 몸을 추스르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곤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다시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어떤 부상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또다시 비에리를 밀착 마크했다. 전반 18분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김태영은 후반 18분까지 이를 악물고 뛰었다. 결국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안정환의 골든 골로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랐다.

경기 후 검사에서 김태영의 코뼈는 골절된 것으로 진단됐다.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태영이 차지하는 수비 비중이었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를 뺄 수 없다는 게 코칭스태프의 고민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의료진은 머리를 맞댔다. 그때 찾아낸 아이디어가 마스크였다.

일본에서 마스크를 한 채 경기를 뛴 선수를 떠올린 의료진은 수소문 끝에 일본의 마스크 제작자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도 흔쾌히 응했다. 이런 긴박함 속에 김태영의 마스크는 탄생했다. 마스크 색이 붉은 건 투지를 불사르겠다는 김태영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다.

‘마스크 맨’ 김태영은 스페인과 8강전을 포함해 남은 한국 경기를 모두 뛰며 투혼의 상징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마스크를 쓰고 축구 경기를 한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던 시절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고, 감동 드라마의 소재로 잘 어울렸다.

2002년 이후 안면 부상을 당한 선수가 마스크를 쓴 경우는 종종 있었다. 2008년 광대뼈가 함몰됐던 정조국(FC서울)이나 2011년 코뼈 부상으로 수술까지 받은 뒤 기어코 출전을 감행한 신형민(포항), 2015년 안면 복합골절을 당한 이정협(상무) 등은 모두 마스크 맨으로 기억된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출전의지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외국인 선수 중엔 오스마르(FC서울)가 생각난다. 그의 정신력도 만만치 않았다. 2017년 FA컵 32강전에서 코뼈 골절상을 당한 뒤 2주 만에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K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등 투지가 남달랐다. 그는 2015년에도 마스크를 쓴 적이 있다. 2년 전 쓴 마스크를 보관하고 있다가 부상당하자 다시 꺼내 쓴 것으로 전해진다.

대구FC 정태욱.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19일 열린 K리그1 대구-인천전에서 또 한 명의 마스크 맨이 등장했다. 대구 수비수 정태욱(22)이다. 코뼈 골절을 당한 그는 이날 마스크를 쓰고 풀타임을 뛰며 팀 승리(2-1)에 힘을 보탰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태욱을 다치게 한 선수는 FC서울 오스마르다. 정태욱은 11일 열린 K리그1 경기에서 후반 막판 오스마르와 공중 볼 경합을 벌이다 팔꿈치에 맞은 뒤 쓰러졌다. 코뼈 골절로 수술이 불가피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하지만 그는 수술 대신 마스크를 택했다. 수술을 받으면 한 달 이상 쉬어야 했다.

아주대를 졸업한 정태욱은 지난해 제주 유나이티드를 통해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국가대표로 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제주에서는 비록 5경기 밖에 뛰지 못했지만 올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로 대구에 둥지를 틀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4cm의 큰 키를 이용한 수비능력과 위치선정, 빌드업이 좋다는 평가 속에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좋은 흐름 속에 부상을 당했으니, 선수 마음은 오죽했을까.

대구는 올 시즌 돌풍의 주인공이다. K리그에서 4위로 상위권이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선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얇은 선수 층이 고민이다. 정태욱이 마스크 맨을 자청한 이유 중 하나다. 구단은 선수보호차원에서 만류했지만 정태욱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결국 구단은 급하게 맞춤으로 마스크를 제작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인천전에 선발로 나선 정태욱은 강한 의지만큼이나 힘찬 플레이를 보여줬다.

대구는 22일 광저우 에버그란데(중국)를 상대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16강 진출 여부가 걸린 중요한 일전이다. 이번에도 정태욱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뛸 예정이다. 행운을 빈다.

최현길 전문기자·체육학 박사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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