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목(生木)의 소리를 가진 악기, 바순. 바순은 소리에 향기를 품은 악기다. 협연을 할 때는 다른 악기들의 소리에 나무의 향기를 덧입혀준다. 그 향이 은은하기 이를 데 없어 사운드가 한결 고아해진다. 굳이 표현하자면 ‘소리의 훈제’라고 부르고 싶다.

바수니스트 이지현의 다섯 번째 ‘바순시리즈’가 2월 1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렸다. 이번 시리즈의 주제는 ‘빛’이었다. 이지현이 선곡한 프로그램은 모두 어떻게든 빛과 연관이 되어 있다.

바순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독주회치고는 꽤 많은 악기들이 무대에 올랐다. 피아노(이혜진)와 단출하게 생상의 바순소나타 Op.168로 연주회의 문을 열고, 이어지는 로시니의 듀오곡 ‘바순과 콘트라바순을 위한 이중주’ D장조에서는 보기 드문 콘트라바순(이혜라)과 호흡을 맞췄다.
이 곡은 원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위해 쓰인 작품이으로 바순과 콘트라바순을 위해 편곡했다. 천재 로시니가 반나절 만에 완성했다는 곡이지만 상당한 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2부는 스위스 출신 가수이자 작곡가,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에두라라드 두 푸이의 바순 퀸텟. 바이올린(이문영 이소진), 비올라(김아란), 첼로(이지영)이 이지현의 바순과 함께 했다.
이들 퀸텟은 상당히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마치 현악기들이 잎사귀처럼 벌어져 바순이라는 꽃을 피우는 과정처럼 보였다.
이지현은 현악기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바순의 나무 향을 머금고, 다시 허공을 향해 도포했다. 그 향이 사운드에 스며들어 은은한 빛이 된다.

마지막 곡은 프랑스 출신 작곡가 보트리의 ‘Interferences pour Bassoon et Piano’. ‘바순과 피아노를 위한 간섭’이라는 제목처럼 바순과 피아노가 서로 간섭과 방해를 하다가 끝으로 갈수록 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현대적인 작품이지만 유쾌하고 유머가 담긴 곡이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1부와 2부 연주에 앞서 이지현은 바순대신 마이크를 잡고 곡에 대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연주보다 더 떨린다”는 이지현의 말은 사실이었을 테지만 덕분에 무대와 객석의 온도차가 한결 좁혀질 수 있었다.

끊이지 않는 박수에 무대 위로 두 번 불려나온 이지현은 세 번째 커튼콜에서 앙코르로 찬송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연주했다. 그의 앙코르 연주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듯 아련했고, 보일 듯 말 듯 반짝이며 다시 멀리 사라져 갔다.
그것은 이지현이 이날 연주회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그 어떤 ‘빛’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빛의 열매는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그의 연주는 그렇게,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