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PD“‘이산’넘고이젠마지막산,남은욕심은시청률뿐이죠”

입력 2008-06-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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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부터‘이산’까지…“앞으로한작품만더만들고연출에서떠나련다”
드라마 ‘이산’의 이병훈 PD는 “앞으로 한 작품만 더 만들고 연출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허준’, ‘대장금’, ‘이산’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시장을 점령한 숱한 히트작을 내놓은 이 사극 명장은 “현장에서 뛰기가 점점 힘에 부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꾸 다치니까 아내가 제발 그만두라고 다그치는데 이제는 그 뜻을 들어줄 때가 된 것 같다”면서 38년 동안 몸담은 ‘현장’ 대신 가정으로 돌아가고픈 속내를 내비쳤다. 11개월의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MBC 월화사극 ‘이산’의 이병훈 PD를 16일 MBC 여의도 사옥 내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난해 말 드라마국 모두가 일산 드림센터로 이사했지만 이 PD는 촬영을 이유로 이사를 미뤄왔다.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을 찾은 이날, 그의 사무실은 뒤늦은 이사 준비로 분주했다. - 한 작품만 더 연출하고 은퇴하겠다고 하는데. “두렵다. 시청자는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 아내는 더 늦기 전에 끝내라고 한다. 계속하면 망신만 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대장금’ 때 어깨를 다쳤고 ‘이산’ 때는 카메라 크레인이 부딪혀 눈자위를 12바늘이나 꿰맸다. 아내가 이러다가 큰일 나지 않을까 걱정이 심하다. 더 큰 이유는 시청자와의 게임에서 이제는 이길 자신이 없다.” - MBC에서 내년 방영키로 한 드라마가 마지막 작품이 되는 건가. “맞다. 8월부터 새 드라마 준비를 시작한다. 물론 사극이다. 생각해 놓은 인물들이 몇 명 있는데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할수록 겁이 난다. ‘대장금’까지만 해도 ‘이병훈 표 사극’이란 말은 안했다. 이제는 새로운 사극을 만드는 게 너무 어렵다. 한 가지 미션을 주고 해결하는 방식도 비판을 받는다. ‘로스트’나 ‘CSI’ 같은 미국 드라마도 비슷한 형식인데 비판 받을 때마다 아쉽기도 하다.” - ‘이병훈 표 사극’은 연출자에게는 굴레였는가. “99년 작 ‘허준’으로 작품 세계를 바꿨다. 당시 의대에 다니던 딸이 ‘재미없는 사극 좀 그만하라’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딸부터 볼 수 있는 사극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궁중 이야기 대신 역사 속 인물을 찾았다. 그렇게 ‘허준’과 거부 임상옥의 ‘상도’, 의녀 ‘대장금’이 탄생했다. 대사도 현대적으로 바꾸고 흰색 일색이던 의상들도 각 인물에 맞춰 대략 40∼50여 벌의 파스텔 톤으로 교체했다. 뉴 에이지 음악을 택했다. 밤 장면도 역광으로 촬영했다. 이런 과정이 ‘이병훈 표 사극’을 만들었는데 반복되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지루한 모양이다.” - 배우들은 이병훈 PD를 두고 ‘사학자 부럽지 않은 역사 지식을 소유했다’고 평한다. “현장에서는 교수 노릇을 한다. 촬영장이 때론 학교 분위기로 바뀐다. ‘이산’을 준비하면서 관련 책 30여 권을 읽었다. 80년 MBC에서 1년 반 동안 ‘암행어사’란 드라마를 하면서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그 때부터 모은 조선왕조실록만 300권이다. 경국대전 등을 합해 600권의 역사서가 있다. 시청자들의 항의에 답변을 하려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조선왕조실록 CD가 발매돼 편하고 인터넷 검색이 훨씬 빠르고 쉽다.” - 연기자 수가 많은 사극을 연출했다. 배우가 미울 때도 있을 것 같다. “‘허준’을 하면서부터 현장에서는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가치관을 세웠다. ‘허준’ 촬영 당시 배우, 스태프들과 ‘남에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화를 내거나 불쾌하게 만들면 누구라도 1만 원의 벌금을 내자’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매일 나만 벌금을 냈다. ‘이산’ 때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결과가 좋았다. 나는 배우가 NG를 내는 걸 문제 삼지 않는다.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린다. 너무 편해서인지 ‘대장금’ 때 박정숙은 한 장면에서 무려 50번이나 NG를 내기도 했다.” -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애용자다. 배우들을 혼낼 때도 문자 메시지를 이용한다고 하던데. “한 달에 8000원 정액제로 1000건의 문자 메시지를 이용하고 있다. 드라마를 만들 때 연기를 못하는 배우에게는 촬영 뒤 문자 메시지로 혼을 낸다. ♥나 ★를 넣어 부드럽게 충고를 한다.”(이병훈 PD의 문자메시지 속도는 10대 엄지 족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 ‘허준’으로 시청률 50%를 넘었고 ‘대장금’으로 한류를 주도했다. 남은 욕심이 있나. “‘이산’이 시청률 40%를 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다. 훌륭한 정치를 하는 훌륭한 임금은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못된 임금의 악한 정치가 진정한 드라마다. 정조의 치세를 다룬 후반기가 못내 아쉽다. 나의 계산이 실패한 결과다. 욕심이 남았다면 당연히 시청률이다.” - 38년 경력의 연출자에게 시청자는 어떤 존재인가. “하느님이다. 시청자는 가르쳐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받들어야 할 존재다. 때론 시청자가 변덕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럴 때 연출자는 제안을 해야 한다. ‘도화서를 만들었으니 한 번 감상해 보라’는 식의 권유다. 연출자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Clip! - 이병훈 PD가 걸어온 길 MBC PD로 입사해 74년 ‘113 수사 본부’로 연출을 시작했다. 78년 ‘역사인물’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조선시대 역사에 눈을 떴다. 이어 80년 ‘암행어사’를 통해 사극 연출자로 나섰다. 83년부터 ‘조선왕조 500년’을 연출하며 명성을 쌓았다. ‘허준’을 통해 왕 중심의 사극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이 녹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선보였고, 이어 ‘대장금’과 ‘이산’을 통해 명성을 쌓았다. 국내 방송가에서는 ‘용의 눈물’의 김재형 PD와 더불어 ‘사극 명장’으로 불린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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