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동아창간특집/한국야구의힘!]대한야구한세기만에‘위대한韓세기’열다

입력 2009-03-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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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한국야구연대기
「1905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이땅에 야구를 이식한 지 104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야구는 한국사와 궤를 같이하며 성장했다. 일제시대의 모진 풍파를 견디며 잔디처럼 끈질긴 생력을 유지했고,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역사 속에 자아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질곡의 역사를 벗어난 한국야구는 1960년대 실업야구 붐을 타고 서서히 아시아야구의 맹주를 자처하는 일본야구에 대항마로 성장했고,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한국경제가 일어선 것처럼, 고교야구 전성기 속에 그 성장의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대 프로야구 창설로 세계 속의 한국야구로 급속하게 발전해나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 강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정상의 위치로 도약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2006년 제1회 WBC 4강,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이번 WBC 결승진출. 한강의 물결처럼 100년을 도도하게 흘러온 한국야구는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식 야구’로 새로운 패러다임과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스포츠동아는 창간 1주년을 맞아 한국야구 100년사의 흐름을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한국야구의 힘의 원천을 짚어보기 위해서다.」 ○야구의 도입, 짚신에 잠방이 입고 필립 질레트. 한국명 길례태(吉禮泰)로 불린 이 선교사가 바로 이땅에 야구를 전파한 인물이다. 질레트는 1901년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조선행 배에 몸을 실은 뒤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입성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초대총무를 맡은 그는 야구가 선교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면서 1905년 ‘황성YMCA 야구단’을 창설해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해에 YMCA 선수들과 선교사들 사이에 역사적인 첫 경기가 펼쳐졌다. 이것이 한국야구의 원류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팀끼리 최초로 벌어진 경기는 1906년 2월 11일 훈련원 마동산에서 열린 황성YMCA-덕어(독일어)학교전. YMCA는 조선 최강팀으로 지방원정을 다니며 초창기 야구붐을 주도했다. 당시 운동복은 무명 적삼이었고, 운동화는 짚신이었다. 공은 실뭉치에 가죽을 덧씌워 만들어 아무리 세게 쳐도 50m도 날아가지 않았다. 맨손으로 볼을 받고 빨랫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타격을 했다. 그러나 야구의 재미에 흠뻑 빠진 백성들은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태화관 앞마당 좁은 공터에서 야구놀이를 하느라 북적였다고 ‘조선야구사(이길용 저)’는 전하고 있다. ○일제의 탄압 속에 야구의 뿌리를 내리다 1913년 스승인 질레트 선교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으로 떠나면서 YMCA 야구단도 결국 방향을 잃고 해체수순을 밟게 됐다. 그러나 한국야구는 물밑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YMCA 이후 최강팀으로 올라선 오성구락부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최강팀 용산철도국을 두 차례나 꺾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일본인 관중들이 선수들에게 덤벼들다 한국인 관중들과 집단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국민적 슈퍼스타였던 이원용은 1917년 오성구락부와 중앙YMCA를 통합해 ‘고려구락부’를 조직했고 1920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를 창립해 각 종목 경기들을 체계적으로 치러내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원용은 사비를 털어 1922년 일본을 방문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을 초청해 국내 선수들에게 선진야구를 습득하게 하면서 국민적 야구붐을 일으켰다. YMCA 야구단에서 활약하던 1세대 인물들은 서양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고, 특히 허성은 미국에서 돌아온 뒤 1923년 이원용과 함께 조선야구심판협회를 창립하며 한국야구 자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일제시대 한국야구의 발전은 동경유학생 모국방문단이 주도했다. 일본야구에서 습득한 야구 기술과 전술을 모국선수들에게 시범 보였고, 그것은 곧 발전의 자양분이 됐다. 1924년 하와이 이민 동포들과의 친선경기 등 해외동포들은 일제시대 한국야구 발전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일제시대 최고의 스타는 팔방미인 이영민이었다. ○해방 이후 고교대회 창설과 실업야구 붐 해방 후 1946년 조선야구협회가 창립되면서 1946년 청룡기, 1947년 황금사자기 등 전국규모 고교야구대회가 창설됐다. 한국야구는 뿌리부터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 장태영,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 ‘전설의 좌완’ 김양중이 해방 이후 1세대 스타로 떠오르며 한국야구는 국민스포츠로 발빠르게 파고들었다. 1950년대 고교야구는 서동준 신인식을 배출한 인천의 전성시대였고, 성인대표팀은 1954년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 아시아 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투수 신용균과 4번타자 김응룡의 맹활약으로 사상 처음 일본을 꺾고 우승하는 감격을 맛봤다. 1960년대 은행을 중심으로 실업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양적·질적 팽창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1966년 하와이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처음 국제무대 원정을 나섰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MVP 박영길을 배출하며 두 번째 아시아 정상에 선 한국야구는 실업야구를 통해 힘을 배양하던 시기였다. ○1970년대 고교야구 전성기 1970년대부터는 야구붐이 고교야구로 옮겨붙었다. 1967년 대통령배가 창설된 데 이어 1971년 봉황대기가 시작되면서 고교야구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경북고는 임신근, 남우식 등 ‘철완투수’를 배출하며 최강자로 떠올랐다. 모교와 애향심에 기반을 둔 고교야구 붐을 타고 서울과 인천을 비롯해 대구, 부산 등 영남지방 중심으로 성행하던 야구가 호남으로 불길이 번졌다. 광주일고로 힘겹게 버티던 호남에 김봉연 김준환 등을 스타로 배출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가세하면서 전국적으로 고교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고교야구 대회가 열릴 때면 동대문구장은 인산인해였고, 이는 곧 프로야구의 탄생을 일으키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대표팀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마침내 사상 처음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쾌거를 달성했다. 당시 김응룡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고 이선희와 김재박은 우승의 영웅이 됐다. ○프로야구 초창기와 세계야구 교류 프로야구의 출범은 한국야구가 세계야구로 도약하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1982년 지역에 기반을 두고 6개구단으로 출발하면서 야구는 한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또한 그해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은 야구의 인기와 자신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 계기가 됐다. 장명부 김일융 홍문종 등 일본프로야구 출신 재일동포 스타들이 국내 프로 무대에서 뛰면서 선수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선진 야구 기법을 체득했다. 또한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 팀과의 꾸준한 교류, 해외 스프링캠프와 코치연수, 1991년부터 시작된 한일슈퍼게임 등을 통해 세계수준과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ML로, 일본으로 해외로 진출하는 스타들 1994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한국야구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뒤를 이어 김병현 서재응 김선우 봉중근 최희섭 추신수 등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됐다. 메이저리그는 여전히 꿈의 무대지만 한국 선수들도 세계 정상급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또한 대학졸업생 조성민에 이어 프로야구 슈퍼스타 출신인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 정민태 정민철이 차례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다. 한국선수들이 세계무대를 노크한 것은 이들의 기량발전은 물론 한국야구 전체의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됐다. TV 생중계와 기사들을 통해 야구인뿐 아니라 팬들도 멀게만 느껴졌던 선진야구와 친밀도를 높였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한국야구는 큰 공부를 했다. 박찬호 선동열에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타자로 꼽히는 이승엽이 일본무대에 진출해 한국팬들은 안방에서도 일본 최고선수들의 기량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야구 발전에 큰 힘이 됐다. ○국제무대, 세계정상권으로 도약한 한국야구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한국야구는 메이저리거 박찬호를 비롯해 사상 처음 프로선수를 참가시키면서 ‘드림팀’을 구성, 금메달을 따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역시 프로 정예멤버를 참가시킨 아시아의 맹주 일본을 꺾고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을 수확하는 성과를 얻었다. 2000년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휩쓴 한국야구는 그러나 자만심에 빠지면서 2004년 아테네올림픽 탈락,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참패를 연이어 겪으면서 추락했다. 특히 일본은 물론 대만에 잇따른 패배를 당하면서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같은 아픔으로 인해 한국야구는 실패를 거울삼아 더 단단해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2006년 WBC 4강에 이어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로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번 WBC 결승진출로 인해 세계가 인정하는 야구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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