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율화의 더 팬] 야구가 가져다주는 힘과 용기

입력 2011-06-2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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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가 휩쓸고 간 1999년의 대한민국은 암울했고, 때맞춰 대졸 백수가 되어버린 나의 암담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세상 어디를 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고 이대로 영원히 도태될 것 같은 좌절감에 허덕이면서, 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패배주의에 젖어있었다.

나의 한화 이글스도 사정이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대리그제로 운영되던 당시, 한화 이글스는 매직리그 2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드림리그 3위인 현대 유니콘스에게 승률에서 뒤져 플레이오프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추석을 앞둔 어느 가을날, ‘되는 일이 없자니까 야구도 저 모양이구나’ 싶어 애꿎은 돌부리를 걷어차던, 그렇게 처량하고 쓸쓸한 청춘이었다.

기적은 바로 그때부터 일어났다. 한화는 추석 연휴를 기점으로 10연승을 달렸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두산 베어스를 4전 전승으로 누르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더니, 급기야 그해 10월 29일 잠실구장에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9회초에 장종훈 선수가 결승 희생플라이를 날리며, 그렇게 목이 메이게 기다리던 이글스의 숙원이 이루어지던 그때.

난 벼락같이 깨달아 버렸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고, 나를 가두고 있던 것은 내가 원망하던 세상이 아니라 나의 패배 의식과 자괴감이었다는 것을. 내가 좌절감에 허덕이면서 하루하루 버텨 가는 동안 쉼없이 달려 기어이 꿈을 이루고 만 나의 팀이 그렇게 일깨워 주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이 아니냐며 주위에서는 걱정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한화가 우승을 했기 때문에….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장종훈 코치는 그날의 타석을 회상했다. 정말 긴장했다고, 선수 생활하는 동안 그렇게 떨어 본 적이 없었다고. 그는 알까. 그때 그의 어깨 위에는 동료들의 기대와 팬들의 열망뿐만 아니라, 열패감에 시달리던 어느 팬의 운명도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여름이 오면 선수들의 고단함도 깊어질 것이고, 때로는 하루하루의 플레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때에, 어쩌면 이 순간에 인생이 달라지게 될지 모르는 팬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휘두르는 이 스윙에, 내가 이 순간 던지는 공 하나에,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한 힘과 용기를 얻어 때로는 능력 밖의 큰일을 해내기도 한다는 것을, 부디 한번쯤 떠올려 주었으면 한다.


한화 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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