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한화 강성우 배터리 코치 ‘투수리드의 정석…그는 소통의 달인!’

입력 2011-12-2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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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강성우 코치는 대학 시절 단골 국가대표 포수로 이름을 날렸고, 프로 입단 후에는 투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안방마님으로 인정받았다. 함께 배터리를 이뤘던 투수 염종석은 “투수 리드의 정석이었다”고 기억했다. 스포츠동아DB

11. 한화 강성우 배터리 코치


선수 시절 완벽한 볼배합의 안방마님
코치 전환후에도 투수와의 소통 강조

내년엔 1군코치…KS 우승 꼭 해낸다


1995년 롯데와 LG의 플레이오프 1차전. 롯데 포수 강성우는 한마디로 ‘미쳤다’. 20승 투수였던 이상훈을 상대로 3점홈런을 쳤고, 팀의 8점 중 5타점을 올렸다. LG의 3점을 막아낸 홈블로킹 3개도 빛났다. 그때 사람들은 “강성우가 사실상 8타점을 올린 것”이라고들 했다. 그해 강성우는 플레이오프 6경기와 한국시리즈 7경기에 모두 출장했지만 우승은 하지 못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에 3승1패로 앞서다 세 번을 져 패권을 내줬기 때문이다. 그 가을은 그에게 가장 큰 환희이자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화 강성우(41) 배터리코치. 2001년 SK로 트레이드돼 2005년 은퇴했고, 2006년부터 삼성 코치로 일하다 지난해 한대화 감독과 함께 한화로 왔다. 자주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던 선수 시절. 하지만 한 동료 투수는 그를 “투수 리드의 정석”으로 기억한다.

● 천운과도 같았던 야구와의 인연

동네야구에서도 포수는 비인기 포지션이었다. 아무도 안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가 나섰다. 그런데 두 살 위 야구부 형이 “공 참 잘 받네. 야구 안 할래?”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곧바로 테스트를 받았고 합격했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자 2년간 몰래몰래 숨어서 야구했다. 결국 5학년 2학기 때 ‘현행범’으로 잡혀서 야구를 쉬어야 했지만.

그래도 천운이 따랐다. 야구부가 있는 대신중으로 배정받았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기간. 창밖을 봤더니 운동장에서 초·중교 야구대회를 하고 있었다. “교실 창문에 달라붙어서 책도 안 보고 야구만 봤어요. 어찌나 미련이 남던지. 3개월 동안 부모님을 쫓아다니면서 빌고 또 빌었죠.” 결국 아들이 이겼다. 때마침 야구부에는 포수가 부족했다. 소년 강성우는 그렇게 포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 아마 시절에는? 단골 국가대표 포수

하마터면 내야수로 전업할 뻔했다. “경남상고 3학년이 되기 직전에 새로 부임한 안병환 감독님이 절 3루로 보내려고 하셨어요. 제가 키가 작고 체격도 왜소하니까 다른 후배를 포수로 키우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김성근 전 SK 감독이 안 감독을 말렸다. “왜 성우를 내야수로 돌려? 포수로 재능이 많은데.” 그렇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강 코치는 “당시 김 감독님이 여러 고교를 돌면서 선수들을 지도하시던 때다. 그 한마디에 내 인생이 바뀌어서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그 후 포수 강성우는 경남상고를 전국대회 4강으로 3번이나 이끌었다. 우승도 한번 했다. 뿐만 아니다. 고3 때 세계청소년선수권에 출전하면서 처음 태극마크를 단 뒤 단국대를 졸업할 때까지 세계선수권과 대륙간컵, 1990베이징아시안게임을 비롯한 국제대회에 단골로 나섰다. 그리고 1992년 고향팀 롯데에 1차 지명 선수로 당당히 입단했다.

강성우 코치(위)가 현역 시절 롯데 안방을 지키는 모습. 홈에 슬라이딩해 들어오는 주자는 은퇴한 OB 정수근이다. 스포츠동아DB



● 투수들을 편하게 리드했던 포수 강성우

촉망받았다. 당시 롯데 포수 중 최고참이었던 한문연이 후반기부터 플레잉코치로 돌아서야 했을 정도였다. 첫 해에는 선배 김선일과 번갈아가며 출장했지만 점점 더 많은 기회를 잡게 됐다. 당시 호흡을 맞췄던 염종석 롯데 투수코치는 “성우 형은 국가대표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포수답게 직구와 변화구를 섞는 볼배합이 정석과도 같았다”고 기억했다. “본인 성격이 차분해서 투수들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성우 형의 리드에 고개를 흔들 필요가 없었고, 혹시 고개를 흔들더라도 충분히 믿음이 있었기에 경기를 풀어나가기 수월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못 이룬 꿈이 하나 있다. 강 코치는 “1992년 롯데 우승 때 김민재 코치(현재 한화 주루코치)와 덕아웃을 지키면서 ‘다음에 힘을 모아 함께 우승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 세 번을 다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그 첫 번째가 1995년이고, 두 번째는 현 소속팀 한화와 맞붙었던 1999년이다. 또 2003년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던 SK에서도 역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다. 대신 두 코치는 이제 지도자로서의 동반 우승을 꿈꾸고 있다.

● 스페어타이어 처지에 접어버린 1000경기 꿈

2001년 SK로 간 강병철 감독이 강성우를 불러 들였다. 롯데에서 점점 밀려나는 상황이라 스스로도 원했던 트레이드였다. 첫 시즌에는 가자마자 110경기를 뛰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2002년에 프리에이전트(FA) 포수 김동수가 영입됐고, 2003년에는 박경완이 왔다. 설 자리가 없었다. 그는 “자동차 트렁크에 있는 스페어타이어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선수생활을 끝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하나, 포수 1000경기 출장이 딱 42경기 남았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1000경기를 뛴 포수가 몇 명 없잖아요. 958경기나 나갔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채우고 싶었죠. 하지만 2005시즌 후에도 구단에서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주지 않았어요. 그때 한대화(당시 삼성 수석코치) 감독님 전화를 받았고 코치 생활이 시작됐죠.”

● 강 코치가 말하는 ‘좋은 포수’란?

강 코치는 포수를 키우는 지도자로서의 철학이 확고하다. “포수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팀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항상 투수를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염 코치가 말했던 현역시절 포수 강성우의 특징과 일맥상통한다. “고무줄을 당겼다 풀었다 하듯이 소통하면서, 투수가 공 던지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다독거려줘야죠. 또 벤치에서 감독과 코치가 의도하는 걸 미리 알아채는 눈치와 센스가 필요해요. 움직임도 빨라야 하고요.” 물론 기술적 부분도 꼼꼼하게 가르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뒷받침돼야 할 ‘기본’은 바로 투수와의 소통임을 늘 강조한다.

강 코치는 다음 시즌부터 1군 배터리코치로 복귀한다. 치열한 시즌을 앞두고 잠시 가족과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농구국가대표 출신으로 현재 KBL 기록원인 아내 이강희(41) 씨를 농구장에 데려다주고, 골프하는 큰 딸 소휘(12)를 열심히 뒷바라지한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둘째 딸 서진(10)의 재롱을 보는 데도 여념이 없다. 하지만 내년 1월부터는 다시 유니폼을 입고 한화의 안방을 위해 구슬땀을 흘린다. 포수 강성우는 이제 그렇게 코치 강성우의 삶을 산다.

● WHO 강성우


▲ 생년월일 = 1970년 1월 5일

▲ 출신교 = 부산 대신초∼대신중∼경남상고∼단국대

▲ 키·몸무게 = 173cm·80kg(우투우타)

▲ 프로 경력 = 1992년 롯데 입단∼2001년 SK 이적∼2006년 삼성 코치∼2010년 한화 코치

▲ 통산 성적 = 958경기 1787타수 407안타(타율 0.228) 6홈런 167타점

▲ 국가대표 경력 =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대표, 1991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표,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배터리코치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goodgo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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