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양용모 “내 목소리로 전국서 노래 봉사…최고의 행복”

입력 2017-06-15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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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모는 20대에 화물트럭을 몰다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1년에 한두 번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이 꼬이는” 후유증을 얻었다. 이 때문에 몇 시간 운행되는 항공기나 여객선을 이용하지 못했다. 양용모는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20년 앓던 그 후유증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했다. 사진제공|나래엔터테인먼트

■ 승려→트럭운전사→사업가→늦깎이 가수…양용모의 파란만장 인생

눈물의 청년기…사업 성공 후 매년 봉사
친구 권유로 55세 가수 데뷔…행사 순회
“저 가수 계속보고 싶다는 말 듣고 싶다”

인생의 행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리라. 트로트곡 ‘아서라 마서라’로 활동 중인 양용모(57)는 뒤늦게 인생의 행복을 찾아 나선 늦깎이 가수다.

2014년 55세에 데뷔한 그는 10대 때 승려가 됐다가 20∼30대에 공장 노동자, 트럭운전사, 농부 등으로 고된 청춘을 보냈다. 40대에 사업가로 성공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겪는 동안 삶의 의미와 봉사의 가치를 깨달았고 “행복하게 노래하는 가수”가 됐다.

양용모는 충남 공주 계룡산 기슭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공부를 하려고 중학교 3학년 때 경남 합천 해인사에 들어갔다 그대로 출가해 ‘성우’라는 법명으로 7년을 승려로 살았다. 방위병(현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 절을 떠났고, 자연스럽게 사회에 스며들게 됐다.

살길이 막막했던 양용모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피와 땀, 눈물로 청년기를 보냈고, 인생의 승부수를 던져보자며 대전에서 트럭 몇 대로 물류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사업은 잘 됐다. 돈을 벌고 나니 부모는 이 세상에 없었다. 만시지탄 속에서 그는 “우리 부모 같이 힘든 분들을 모셔야겠다”고 다짐했다. “승려로 수도하며 이해와 베풂을 배운” 양용모는 대전 서구 지역의 독거노인, 차상위층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쌀도 나눠주며 사물놀이 공연으로 위로하는 봉사를 시작했다. 2000년 ‘풍월단’이라는 사물놀이패를 만들었고, 2009년엔 나래예술단으로 키워 마당극을 펼치면서 가수도 초대하는 ‘잔치’로 발전시켰다.

정기행사로 노인들을 돌보던 그는 가수 섭외가 만만치 않았다는 걸 체감했다. 출연을 약속했던 가수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직접 장구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평소 창에도 소질이 있던 터였다. 친구인 작사가 이승학이 그의 노래를 듣고 가수를 권했고, 작곡가 송광수를 소개했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2014년 첫 음반을 냈다. ‘나무 같은 인생’ ‘니가 좋더라’ ‘아서라 마서라’ 등이 수록된 앨범이다.

양용모가 매년 여는 행사가 지역에 소문이 나면서 600∼700명의 노인들이 몰린다. 후원도 받지만 대부분의 비용은 그가 부담한다. 가정형편상 교육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자신의 회사직원들에겐 대학까지 장학금을 지원한다.

“남을 돕다보니 사업이 더 잘 된다. 누굴 돕는다는 것보다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게 기쁘다. 봉사활동은 내겐 힐링이자 활력소이고 자녀에겐 산 교육이다.”

전국을 다니며 방송무대나 행사장에서 노래하는 일은 그에게 “요즘 최고의 행복”이다. 그 즐거운 마음을 바탕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자신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보며 또 행복감을 느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인생 후회도 없고 큰 행복이다.”

‘아서라 마서라’는 전국 노래교실의 애창곡으로 꼽힌다. KBS 1TV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 사이에서도 많이 불린다. 그렇다보니 어느 행사장을 가더라도 따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인기스타는 아니지만, 가수로서 바람은 있다. ‘가수 양용모’로 인해 좋은 향기가 널리 퍼졌으면 한다. ‘저 가수 계속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다. 사업도 잘 유지돼 직원들이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김원겸 기자 gyumm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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