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진정 순결했던 사랑…청춘들의 영원한 로망

입력 2018-11-23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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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맨발의 청춘’은 남자주인공 신성일을 통해 철없지만 비장할 수밖에 없는 1960년대 청춘의 모습을 보여줬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신분 장벽은 청춘을 더욱 비장하게 만들었다. 개봉한 지 50년 이상이 지났지만 모두 명장면으로 꼽힌다. 사진제공|한국영상자료원

■ 故 신성일의 대표작 영화 ‘맨발의 청춘’

맨몸뚱이 하나로 세상에 맞선 남자
철 없는 청춘의 비장함인가?
리어카에 실려간 두수의 죽음
훤히 드러난, 차디찬 맨발처럼
세상은 끝까지 잔인했고
청춘은 더없이 뜨거웠다


작가 김승옥이 그려낸 당대의 풍경은 쓸쓸하며 적막하다. 스물다섯 살 먹은 ‘나’와 대학원생 ‘안’ 그리고 서적 외판원인 ‘서른 대여섯 살짜리 사내’가 만나 함께 보낸 하룻밤의 풍경이 그랬다.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밀려나듯 포장마차에 스며들어 나누는 무의미하고 현학적인 말들, 이내 택시를 타고 불자동차를 쫓아 불구경을 하며 절망적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려는 사내, 그리고 그가 맞는 삶의 비극적 종착점과, 도망치듯 거기서 빠져 나가려는 나와 안. 이들이 맞이한 겨울의 서울 밤 풍경은 문명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이 맞는 시간의 적막함 같은 것이었을까. (소설 ‘서울, 1964년 겨울’)

그 다른 편에서 또 다른 젊음은 화려했지만 그만큼 어둡기도 했다. 화려한 만큼 어둡다는 것, 도시문명이 밀어낸 아니면 도시문명으로부터 스스로를 밀어내려던 세 젊음의 소외감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신분의 차이로부터 찾아왔다.

● 라스트 신의 또렷한 대비, 드러나는 비극성

신분의 현격한 차이는 기어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사랑을 지키고자, 사랑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세상이 벌려놓은 신분의 현격함은 결국 서두수와 요안나로 하여금 “물레방앗간에서 정사(情死)”를 택하게 했다.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선택을 그나마도 위로하려는 듯 화려한 조화로 장식한 승용차의 장의 행렬, 단 한 장의 거적때기에 덮어진 채 차디찬 맨발을 훤히 드러내며 터벅터벅 힘없이 바퀴를 굴려가는 리어카. 이렇듯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남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한 프레임 안에 잡아낸 카메라는 그 이야기의 비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다만 저만치 지나가는 화려한 장의 행렬을 바라보며 리어카를 끌며 선배의 죽음을 탓하면서도 보듬어 안으려는 후배의 통한은 허무할 뿐이다. 그가 벗어 선배의 맨발을 감싸주는 값싼 구두로 인해 끝내 이루지 못한 두 남녀의 사랑은 더욱 아프게 가슴을 찌른다.

그럴 때 차라리 장엄하게 흐르는 고전음악풍의 배경음악이 아니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치익치익’ 드럼의 심벌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오며 시작되는 최희준의 노래, 영화의 서두를 알리는 노래가 깔렸다면 말이다.

‘눈물도 / 한숨도 / 나 혼자 씹어 삼키며 / 밤거리의 / 뒷골목을 / 누비고 다녀도 / 사랑만은 / 단 하나에 / 목숨을 걸었다 / 거리의 / 자식이라 / 욕하지 마라’ (주제가 ‘맨발의 청춘’)

2분의2 비트에 실린 색소폰 선율이 더욱더 도시의 뒷골목 어두운 풍경을 상상하게 하는 멜로디는 최희준의 탁성 속 가득한 매력과 함께 도전적인 노랫말로써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청춘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렇기에 눈 쌓인 길 위에서 리어카에 실려 세상을 등지고 나아가는 차가움을 감당해내고야 마는 두수의 비극적 결말마저도 비장할 수밖에 없다.

영화 ‘맨발의 청춘’의 한 장면. 사진출처|영화 ‘맨발의 청춘’ 캡처


● “철없어” 비장했다

두수는 모든 장면에서 비장했다. 다방은 “무서워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베토벤의 ‘운명’이나 차이코프스키의 고전음악 같은 클래식을 들으며 주스를 마시”고 하루를 정리하는 우아한 일상 속 외교관의 딸과 설레는 첫 데이트를 하고 나서 그녀를 보내려 택시를 호출하는 순간에도 그렇다. 손을 내뻗고 상체를 가볍게 흔들면서 “택시!”를 부르는 모습은 수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수없이 패러디되며 청춘의 비장함을 가득 뿜어낸다.

비장함은 두수가 입은 털스웨터와 가죽점퍼 그리고 청바지에서도 배어 나왔다. “전과 몇 범이라는 딱지가 붙은 인간쓰레기”이며 “뒷골목을 헤매는 신세”라며 자탄할지언정, 그렇게 맨몸뚱이 하나만으로 세상과 맞서려는 그에게 털스웨터와 가죽점퍼 그리고 청바지는 기성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상징이기도 했다.

청춘의 비장함은 때로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착 달라붙는 청재킷과 청바지 차림으로 두수의 후배 ‘아가리’는 현란한 트위스트를 췄다. 아직 1960년대 초반의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도발적이고 성적 분위기 충만한 댄스장면은 청춘들에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의 풍광이다.

이처럼 당대의 청춘은 (기성의 시선에서는)철없이 비장하고 현란해서 도발적인 욕망을 꿈꾸었다. 신분을 뛰어넘으려 했으니 청춘은 아직 채 철들지 않은 비장함으로 맞서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처지를 드러내 보여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자 했으니 청춘은 더 없이 현란해서 도발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철없이 비장하고 현란해서 도발적인 욕망은 비록 비극적 결말로 치달아가고 말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안타까움으로 수많은 청춘을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영화 ‘맨발의 청춘’의 한 장면. 사진출처|영화 ‘맨발의 청춘’ 캡처


● 순결한 청춘의 소망

두수는 요안나로 인해 학을 꿈꾸었다.

“만약 내가 다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학이 되고 싶다. 천년을 살면서도 흰색을 지니고 때 묻지 않는 그런 학이 되고 싶구나.”

두수는 아가리에게 남긴 유서로 자신 생의 마지막 소망을 전했다. 소망은 요안나의 것이기도 했다. 요안나는 “진짜 학이 될 수 있다면, 푸른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고, 학은 오래오래 살면서 다정하게 지낸다잖아요”라고 말했다. 비록 철없는 비장함으로 잔뜩 폼을 잡았다지만 끝내 그렇게 “순결”한 결말로써 청춘은 비극적 최후를 맞아들였다.

아마도 그 이후로 숱한 이야기들이 이들 청춘을 마치 중요한 표상처럼 여기며 수없이 변주한 까닭도 그것일 터이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이루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자신들이 지닌 현실적 방편으로는 도저히 끝에 이을 수 없었다. 함께 비극적 결말을 맺으며 끝내 이으려 했던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 남은 이들은 두 청춘남녀의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들이 떠나가는 길 위에서마저 각기 다른 처지를 살았고, 또 다른 세상에서마저도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현실은 그 어떤 현재적 영화의 마지막 장면보다 뛰어난 여운을 남긴다. 이를 진부함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것, 당대 청춘의 비장함과 비극적 현재를 살아내지 못한 탓 이외에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영화 ‘맨발의 청춘’의 한 장면. 사진제공|한국영상자료원


■ 영화 ‘맨발의 청춘’은?

4일 세상을 떠난 배우 신성일의 출세작. 김기덕 감독의 1964년 2월 개봉작이다.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건달 서두수와 외교관의 딸인 여대생 요안나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그리고 그 비극적 결말을 그린 이야기.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다. 신성일과 결혼한 엄앵란이 요안나 역을 맡아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냈다. 최희준이 부른 재즈풍의 동명 주제가 역시 크게 히트했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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