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간 영화와 숨쉰 90세 촬영감독 정일성 “‘긴장’은 나의 힘”

입력 2019-10-04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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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어요. 우리의 불행했던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느낀 ‘긴장’이 나를 이끈 원동력입니다.”

90년의 삶 가운데 62년을 ‘촬영감독’으로 살아온 정일성 감독은 시대와 더불어 숨쉬어온 자신의 영화인생을 돌아보며 “격변이 많았다”고 입을 뗐다. 1929년 일본에서 태어나 17세 때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10·26사태를 몸소 겪으면서 영화 작업을 이어온 역사의 경험자이자 증인이다.

“긴장 속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영화인으로서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계속 고민해왔다”고 말하는, 이 거장은 한편으론 “지금껏 찍은 130여 편 가운데 40~50편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 마음”이라고도 털어놨다. 90세인 지금 “길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 만들고 싶은 꿈”을 꾸는 영화인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이틀째인 4일 오전 해운대구 센텀시테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을 만났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격조와 파격의 예술가” 정일성 촬영감독을 선정했다.

이날 오랜만에 취재진과 만난 그는 “영화를 시작하고 10년 즈음 지났을 때 외신으로 히치콕 감독의 회고전이 열린다는 걸 보고 ‘어떻게 평생 영화를 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고 돌이키면서, 어느덧 자신이 그 자리에 선 것에 대한 소회와 지나온 영화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 “내가 만든 40~50편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 마음”

정일성 촬영감독은 이번 회고전을 통해 ‘화녀’부터 ‘만다라’ ‘만추’(김수용 감독) ‘본 투 킬’까지 대표작 7편을 소개한다. 한국영화 100년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충녀’, ‘바보들의 행진’, ‘서편제’ ‘취화선’ 등이 그의 ‘눈’을 통해 완성됐다.

대표작을 꼽기도 어려울 만큼 숱한 화제작을 탄생시킨 주역이지만 정작 그는 대표작을 언급하기를 주저했다.

“실패한 40~50편의 영화가 지금도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굉장히 부끄러운 영화들이에요.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습니다. 젊을 때 ‘대표작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흥행이 잘된 영화,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를 꼽곤 했는데 정말이지 철없는 말이었어요. 나에게는 실패한 영화가 좋은 교과서 같습니다.”

그야말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몸소 겪은 그는 한국전쟁 직후 “미군이 쓰던 필름을 재활용해 영화를 찍던” 1957년, ‘지상의 비극’으로 데뷔했다. 마지막 영화인 2007년 ‘천년학’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었지만 그 사이 부침도 겪었다. 시대와 사회의 영향이 컸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직후였다”고 회고했다.

“한국영화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잠복기이자 침체기였다”며 “영화를 만들 때보다 만들 수 없던 그 때가 더 힘들었다”고도 말했다. 그럼에도 이만희, 김기영 감독처럼 창작의 열정으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은 연출자들이 있었고, 덕분에 영화의 맥은 이어졌다고 짚었다.

남북한 분단이 만든 “긴장”은 그를 ‘촬영감독’으로 살아가게 이끈 힘이다.

“남북한이 분단됐다는 사실에 굉장히 긴장하면서 살아왔어요. 그 긴장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분단의 갈등과 이념 속에 가족의 해체도 벌어졌고 정권과 반하는 영화들이 대립했어요. 나도 그 일원으로 지금까지 작업을 해왔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보낸 대부분의 시기는 ‘표현이 자유’가 억압받던 때이기도 했다. 급변하는 정치 지형에 따라 한국영화는 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 일련의 과정을 소개하던 그는 임권택 감독과 작업한 ‘알래스카의 늑대’라는 제목의 영화에 얽힌 일화를 꺼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왜 미국 지명을 제목에 지칭하느냐’고 난리였죠. 차라리 ‘진도의 개’라고 지으라는 참견까지 했어요. 그 땐 표현의 자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마치 포르노 같은 한국영화들이 10여 년간 지속됐어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분노를 푸는 건 영화를 통해 저항하는 것이었어요. 색채의 저항이라고 봐야할 ‘화녀’ 같은 작품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더 어둡게 그리는 ‘만다라’를 통해 그렇게 저항해왔습니다.”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영화에 몰두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나는 원칙주의자”라는 말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시작했다.

“형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 위에 있는 건 ‘격조’입니다. 격조는 영화감독이 아닌 촬영감독이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촬영 감독의 역할이 뭘까…. 그 질문은 젊은 시절부터 가진 숙제였어요. 가령 리얼리즘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안에 ‘꿈’이 없으면, 한낱 뉴스로 전락하는 겁니다.”


● “길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 만들고 싶은 꿈”

정일성 촬영감독은 인생에 두 차례 고비를 맞았고 그 때마다 자신을 다시 일으킨 건 ‘영화’와 ‘감독들’이라고 했다.

1979년 교통사고를 당해 대수술을 받은 직후 “김수용 감독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줬다”고 했고, 이듬해 직장암 선고를 받은 뒤 재기할 수 있던 건 “임권택 감독 덕분”이라고 했다.

“두 감독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빚을 갚아야 하는데 아직 다 못한 것 같아요. 임권택 감독과는 30여 년을 같이 했죠. 강산이 세 번 변했습니다. 임 감독은 나이가 여섯 살 어리지만 역사나 사회, 미래에 대한 생각이 거의 일치했어요.”

‘만다라’부터 ‘서편제’에 이르기까지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들을 함께 일군 정일성 촬영감독은 “오래 같이 일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져 서로에게 독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고 그 때 우리는 헤어졌다”고 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장군의 아들’부터다.

당대 영화감독들과의 협업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사람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온 그는 “내가 영화를 만들던 때보다 요즘 더 좋은 작품이 나오고 있는 건 고무적”이라면서도 “다만 하나의 아쉬움은 있다”고 운을 뗐다.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의 촬영감독입니다. 요즘은 영화 현장에서도, 영화 학도들도 필름을 본 적 없이 모두 디지털로 촬영해요. 필름으로 영화를 한 사람을 마치 골동품처럼 취급하기도 하고요. 영화를 만드는 기술적인 과정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좋은 디지털을 할 수가 없어요. (촬영감독은)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을 감독에게 이론으로 설명할 능력이 있어야 해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빗대, 현재의 한국영화를 향한 생각도 꺼냈다. 그러면서 몇 차례 “개인의 생각”이라고 부연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촬영해 담아낼까 늘 숙제였어요. 사람들이 내가 찍은 영화를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한 번도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아픔을 극대화시켜서 사람들에게 역사의 이어짐을 보여줄까 생각했습니다. 요즘 일련의 흥행 영화가 나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나는 미국영화의 아류 같은 영화는 찍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나는 미국영화를 흉내 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60여 년을 영화에 쏟은 그에게 영화로 이루고픈 또 다른 ‘꿈’이 있을까.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반문이 먼저 나왔다.

“지금껏 38명의 감독과 작업했어요. 많게는 20여 편을 한 감독이 있고, 단 한편으로 끝난 관계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작업할 수 있던 3분의1의 힘은 영화감독들에 있어요. 나머지 3분의1은 영화에 미쳐서 떠돌이처럼 밖으로 다닐 때 혼자 집을 지킨 나의 아내에게 있습니다. 마지막 3분의1은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여 자신을 잘 모르는 “젊은 감독”이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해온다면, 그는 그 손을 잡고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해운대(부산)|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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