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박상열 “수성못 익사 해프닝? 그놈의 술이 원수였지”

입력 2012-06-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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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야구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고양 원더스 박상열 투수코치가 경기도 고양 야국구가대표팀훈련장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고양|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프로원년 OB 우승 멤버…고양원더스 투수 코치


“해병대 수영을 알려주겠다”
취기에 후배와 뛰어든 저수지
다른 방향으로 나와서 숙소행
남의 방서 잠든 사이 팀 발칵
통곡의 수색작업…결국 2군행

김성근 감독과 30년 사제의 끈
초년코치땐 겨울 극기훈련 자원
지금도 기술보다 근성을 주문
“느린 공으로도 이기는게 중요”


21세기의 고양 원더스는 20세기 ‘공포의 외인구단’과 닮았다. 프로야구선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청춘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곳. 낮은 확률이지만 그들은 야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른다. 고양 원더스 박상열(57) 투수코치. 어린 선수들을 보면 40년 전 자신이 떠오른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믿을 것은 자신의 몸밖에 없었다. 야구를 해서 선망의 직장이라는 은행팀에 가고 국가대표로 뽑혀 외국에도 가보겠다는 꿈을 향해 절박하게 살았다.


○30년 스승과 한 명의 은인

1973년 동대문상고 3학년 때였다. 청룡기대회를 위해 기업은행에서 합숙을 했다. 오춘삼 동대문상고 감독이 김성근 감독과 기업은행 동기라는 인연으로 경기도 벽제의 훈련장에서 연습경기를 했다. 박상열은 7회까지 무안타로 던지며 실업팀 선배를 이겼다. 이 때 피칭이 김 감독의 눈에 들었다. 김 감독과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기업은행 선수와 감독으로 시작해 OB, 태평양, 쌍방울, SK, 고양 원더스까지 30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다.

고교야구 선발팀에도 뽑혔다. 투수 인스트럭터가 김영덕 감독. 마구를 알려줬다. 그때까지 박상열은 커브와 스크루볼을 던졌다. 김영덕 감독은 “선수생활 말년에 나도 팔이 내려갔는데 이 공을 던져야 한다”며 싱커 던지는 법을 알려줬다. “요즘으로 치면 원심, 투심 그립이었다. 타자 앞에서 휘거나 가라앉았다. 공끝이 지저분해 졌다.” 싱커는 이때부터 박상열의 주무기가 됐다. 직구도 몸쪽으로 휘고 끝에서 변했다. “포수들이 내 공을 잡기 꺼려했다. 잘못하면 엄지를 다치기 때문이었다.”


○기업은행∼육군∼포항제철로 이어진 실업야구 시절

열심히 훈련한 덕에 국가대표가 됐다. 야구로 이루고 싶은 꿈을 모두 이뤘다. 1975년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동대문구장에서 한국의 개막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필리핀. 아시아야구 강자였다. 선발은 박상열. 8회까지 무안타 경기를 했다. 9회 3루수 땅볼이 나왔다. 강병철이 놓쳤다. 노히트노런이 깨졌다. 1안타 완봉경기가 됐다.

기업은행 선수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했다. 그 사이 소속팀이 없어졌다. 선수 합숙소가 불이 나서 없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새로 창단한 포항제철로 갔다. 군에 있을 때 고(故) 박태준 회장을 만났다. 그는 야구를 좋아했다. 박상열을 보자 “동생(박상돈)도 야구 한다면서? 군에서 제대한 뒤 꼭 우리 팀에 와라”고 했다. 그때부터 포항제철의 월급을 받았다.

포항제철 선수로 지내던 때의 기억 한토막. 포항제철소 단지에 야구장을 만들었다. 개장 기념으로 일본 사회인야구팀을 초청했다. 신일본제철 고베제철 등과의 경기였다. 박 회장이 개막식에 참가했다. 질 수 없었다. 심판에게 “회장님이 계신데 꼭 이겨야 해”라고 했다. 박상열이 선발. 2루심이 애국심을 발휘했다. 일본팀의 사인을 몰래 알려줬다.

27세에 프로야구가 생겼다. 포항제철에서 계장으로 진급해야 할 때였다. 진급이 늦춰지자 야구를 포기하고 직원으로 근무하려던 차였다. 프로에 갔다. 도전했다.


○원년의 OB, 가족 같은 분위기로 우승을 안다!

1982년의 OB는 가족 같았다. 윤동균 김우열 등 대전 출신 선후배들이 많았다. 구경백 매니저는 최고 인기였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현찰을 나눠줬다. 프로가 뭔지 모르는 시기. 잘 놀았다. 대전역 앞 숙소에 있을 때는 매일 밤 열차를 타거나 총알택시를 타고 서울로 가서 놀다가 다음 날 훈련 때 맞춰 돌아오는 간 큰 선수도 있었다.

OB는 주류회사답게 술에 관대했다. 고(故) 박용오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이태원으로 윤동균 김우열 계형철 유지훤 등 선참들을 따로 불러 술을 사주기도 했다.(총재로 취임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OB맥주를 비롯해 회사에서 나오는 모든 술을 섞은 뒤 냉면 사발로 한 잔씩 줬다. 일명 모두모아주. 버스 1대로 원정을 가면 수학여행 분위기였다. 모두가 즐거운 때였다.


○수성못 익사사건, 본인의 입을 통해 듣다!

1985년 대구에서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의 해프닝이 발생했다. ‘수성못 익사사건’이다. “큰 아들을 얻은 뒤였다. 대구 원정숙소의 방으로 후배 몇몇이 술을 들고 왔다. 득남 축하였다. 몇 잔 마셨다. 술이 모자랐다. 장마철이라 비가 내렸다. 후배들을 데리고 인근 포장마차로 갔다. 답주였다. 한 잔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던 중 벌어진 일이었다.”

수성못이 보였다. 박상열은 후배에게 “너 수영 잘 하냐? 내가 해병대 수영 알려줄까”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옷을 벗고 물 속에 들어갔다. 못 가운데 섬까지 무사히 헤엄을 쳤다. “이제 돌아가자. 네가 먼저 가라. 혹시 빠지면 내가 구해줄께”라고 했다. 후배가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고 다른 방향으로 수영을 해서 나왔다.

그런데 후배가 사라지고 말았다. 옷도 없었다. 먼저 돌아간 것으로 생각해 숙소로 돌아왔다. 팬티바람이었다. 프런트에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방으로 올라갔다. 공교롭게도 문이 잠겨져 있었다. 마침 바로 앞 계형철이 자는 방의 문이 열렸다. 조용히 들어가 침대 사이에서 세상 모르고 잤다. 그동안 난리가 터졌다. 후배는 기다리던 박상열이 나오지 않자 물에 빠진 것으로 짐작했다. 얼른 쫓아와 감독에게 사실을 알렸다. 대규모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못에도 없었고, 선수들이 자는 방에도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수성못을 보며 “상열아, 상열아”만을 외쳤다. 뒤늦게 주장 이홍범이 박상열을 찾았다. 결국 2군으로 쫓겨 갔다.


○태평양∼OB∼쌍방울∼두산∼SK∼두산∼LG∼SK로 이어지는 투수 조련 전문가

1988년 선수생활을 끝냈다. 이듬해 태평양 2군 투수코치가 됐다. 프로야구 극기훈련의 백미 오대산 원정도 갔다. 오대산에 선발대로 갔다.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 얼음물에 몸을 던졌다. 맨발로 눈밭을 걷는 행군은 상상 이상이었다. 코치 시절 묵묵히 어린 선수들을 잘 지도했다. 그의 손을 거치면 평범한 투수도 좋아졌다. 여러 팀에서 탐을 냈다. 정치는 못하지만 성실했다. 손재주가 좋아 투수들의 밸런스를 잡는 썰매판도 만들었다.

OB 코치 시절 사상초유의 선수단 집단이탈 사건도 겪었다. 윤동균 감독과 함께 옷을 벗을 생각이었다. 구단은 교육리그에 가라고 했다. 고민 끝에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귀국해 공항에 도착하자 구단 관계자가 “죄송하다”고 했다. 쌍방울로 갔다. 그곳은 사건이 더 많았다. 여자 문제로 청부폭력배들이 선수단 숙소를 기습한 적도, 선발로 내정된 투수가 사채업자에게 납치된 적도 있었다.

여러 팀에서 지도자를 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 기술이 아니라 사람, 인간성이 우선이었다. “세이부의 인스트럭터 무라타가 이런 말을 했다. 지도자는 먼저 선수의 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근성,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둘째 선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야구를 위해 어떤 애정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이 기술이다.” 박상열도 그 지론을 가슴에 새겼다. “본인이 하려고 해야 기술도 빨리 들어간다. 지기 싫어하는 그런 선수들이 마운드에서 타자와 싸울 줄 안다.” 그는 투수들이 빠르게 던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살 길이 있다고 한다. “더 느린 공으로 타자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된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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