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지의 여왕’ 이미자②] 사랑·그리움·여자의 일생…그녀의 노래는 혼자 흘린 눈물

입력 2019-02-22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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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KBS 창사특집 ‘빅쇼’ 무대에 함께 오른 이미자(왼쪽)와 패티김. 노래로 국민을 위로해온 두 명의 ‘살아 있는 전설’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노래하고 있다. 사진제공|KBS

■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 히트곡으로 본 가수인생 60년

‘열아홉순정’과 꼭 같았던 첫사랑
왜색 논란에 금지된 ‘동백아가씨’
이혼·재혼…굴곡진 여인의 삶도
대중들의 심금 울린 노래로 승화


“데뷰 이후 현재까지 가요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고독한 여인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무수한 슬픔 어린 노래들처럼 그녀의 인생은 슬픔을 혼자 씹어야 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데뷔 전까지 헤아리기 힘든 고생을 했고, 지금도 본인만이 아는 고독과 슬픔을 안고 있다.”

1973년 4월12일 자 동아일보는 이미자에 대해 이같이 썼다.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지녀야 했던 아픔과 슬픔을 2000곡이 넘는 노래에 담아낸 그는 지금, 더욱 애잔한 감성으로 60년의 음악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 ‘열아홉순정’

1941년 10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태어난 그는 2년 뒤 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가면서 가난을 맞았다. 1945년 어머니 품을 떠난 이후 외조모 아래서 자라나 1950년대 말 가수 고복수의 가요학원이 개최한 콩쿠르와 HLKZ TV의 노래자랑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재능을 발휘했다. 낮에는 회사, 밤에는 가요학원을 다니며 키운 실력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1959년 18세의 나이에 작곡가 나화랑에게 발탁됐다. ‘보기만 하여도 울렁 / 생각만 하여도 울렁 / 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 / 첫사랑’(열아홉순정)을 이듬해 만나 실제로 열아홉살에 결혼했다.


● ‘동백아가씨’

‘열아홉순정’ 이후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지 못했던 그는 1964년 동아방송 드라마를 원작 삼아 김기 감독이 신성일과 엄앵란을 내세워 만든 동명의 영화에 목소리를 얹었다. 노래를 쓴 작곡가 백영호가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나오기 힘들 것”(위 신문)이라고 평가할 만큼 이미자는 확고한 위상도 굳혔다.

하지만 노래는 1965년부터 ‘왜색(倭色)’이라는 이유로 전파를 탈 수 없었다. 1968년에는 공연과 앨범 제작까지 금지당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여론을 잠재우려 ‘왜색 근절’을 내세운 정치적 노림수가 작용했다는 시선이 나왔다. 임신과 감기로 힘겹게 노래를 녹음했지만 국내 무대에서 부를 수 없었던 그는 1966년 여름 일본으로 날아가 이를 선보이며 아쉬움을 달랬다.


● ‘섬마을 선생님’ 그리고 ‘기러기아빠’

그는 ‘음악동지’이자 스승인 작곡가 박춘석과 1965년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인 ‘진도아리랑’으로 첫 호흡을 맞췄다. 그를 “촌닭 같은 가수”로 불렀던 박춘석은 1965년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흑산도 어린이들이 군함을 타고 서울 구경을 왔다는 보도를 모티브 삼아 ‘흑산도 아가씨’를 이미자에게 선사했다. 한창 인기를 누리며 바쁘던 그가 연습도 없이 바로 녹음을 하는 모습에서 박춘석은 천재성을 발견했다.

이듬해 ‘섬마을 선생님’에 이어 ‘기러기아빠’로 박춘석과 함께한 그는 그러나 이마저도 금지당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중반 은퇴를 고민했다. 다양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해금투쟁’을 벌인 박춘석(1993년 12월6일 자 동아일보)으로부터 위로를 얻었다.


● ‘아씨’ 그리고 ‘여자의 일생’

이미자는 이혼과 재혼 등 “가정생활이 평탄치만은 못했던 한 인간”으로서 “애로와 고통이 많았다”면서 “그러나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훗날 털어놓았다.(1989년 1월24일 자 동아일보) 어린 시절을 함께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가족을 그리워하며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기러기아빠)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그 애타는 마음은 결국 1966년 헤어졌던 엄마를 21년 만에 만나게 해주었다.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아씨) 혹은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 (중략) /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 (중략) /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 아 참아야 한다’고 ‘여자의 일생’을 애처롭게 노래한 그는 슬픔 가득한 정서로 대중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 여자의 노래를 들으면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던 화가 천경자의 언급(1977년 10월1일 자 동아일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

하지만 ‘왜색’과 ‘뽕짝’의 오해와 비하의 적지 않은 말들도 그를 오랜 세월 괴롭혔다. 이는 1987년 ‘동백아가씨’ 등이 해금된 이후 1994년 효성여대 작곡과 박종문 교수가 클래식음악 전문지 ‘낭만음악’을 통해 ‘이미자론’을 펼치기까지 이어졌다. 박 교수는 이미자의 목소리가 “가늘면서도 비단결 같이 고운 소리결을 지닌,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이라며, 트로트가 “음체계상 일본음악이지만 가창양식, 가사, 선율, 화성 등 여러 면에서 한국화를 이루어냈고, 이를 부를 때 우리의 민요와 판소리 같은 정통성악의 가창양식을 도입했다”(1994년 1월8일 자 한겨레)고 평가했다.

음악인생 60년에 접어들어 그는 이제 ‘아팠던 순간조차도 / 황혼길에 붉게 물들면 / 내 노래가 피어나는 / 향기로운 꽃밭 같아라’라고 노래한다. 그런 그를 두고 1973년 4월12일 자 동아일보는 “샹송가수 에디뜨 삐아쁘나 일세기에 한 번 나온다는 일본의 미조라 히바리 같이 뼈아픈 고난을 이겨낸 불멸의 가수”라고 가리켰다.

두 가수가 전쟁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며 대중에게 다가간 것처럼 이미자는 1960년대 이후 굴곡진 현실을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이들과 함께 했다. ‘나 그대와 함께 노래하며 / 여기 있으니 / 난 행복해요 / 감사하여라’라며 ‘내 노래’를 ‘그대에게’ 다시 보낼 수 있는 것도 그런 공감과 위로의 소통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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