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로읽는연극]현모양처‘노라’…“아내아닌인간으로살고싶다”

입력 2008-03-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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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관계의 파멸이 아니다. 새로운 발견과 공간의 흔적이 남는 사건이다. 19세기 헨릭 입센의 고전 ‘인형의 집’의 부부 ‘노라’와 ‘토어발트’가 그렇다. 노라가 남편 토어발트와 헤어지는 순간, 빈 쭉정이나 다름없던 ‘인형’ 노라는 사라지고 없다. 진정한 사랑의 대상인 줄 알았던 남편이 사회적 위신을 앞세우고 자신을 감싸주지 않자 노라는 미련 없이 남편과 헤어진다. 그 자리에는 자신을 과잉 방어하다 사랑에 소외된 남편과 자기를 찾아 떠나는 아내가 서있게 된다. 노라 : 미안해요. 이렇게 말한다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토어발트 : 우리 사이의 벌어진 틈을 이을 수는 없겠소? 나는 다른 남자가 될 수 있소. 노라 : 그럴 수도 있겠죠. 당신 손에서 인형이 달아난다면 말이에요. 토어발트 :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오빠와 동생으로 살아갈 수는 없겠소? 노라 : 그게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아시잖아요. 토어발트 : 최소한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해요. 노라 : 아이들은 볼 수 없어요. 저는 8년이라는 긴 세월을 낯선 사람과 살아왔어요. 그 낯선 남자와 함께 세 명의 아이를 낳았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해요.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이요. 이제 당신을 떠나겠어요. 토어발트 : 당신은 제 정신이 아니오.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겠소. 노라 : 당신은 제게 어떤 것도 명령할 수 없어요. 토어발트 : 사람들이 뭐라 하겠소? 노라 : 여기 당신이 준 반지가 있어요. 제 것도 주세요. 끝났어. 모든 게 끝났어. 모든 게 끝났어. -리 브루어 연출 ‘인형의 집’ 마지막 장면 중에서- ‘인형의 집’은 1879년 초연 당시 아내의 가출로 사회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이번에 한국을 찾는 ‘리 브루어’ 연출의 ‘인형의 집’은 원작을 충분히 살리되, 인형극, 오페라 등 새로운 장르를 섞어 실험극단 ‘마부마인’의 색을 분명히 한다. 특히 노라에게만 집중된 ‘인형의 집’이 아닌 노라와 토어발트, 남녀를 동시에 아우르는 새로운 ‘인형의 집’을 선보인다. 리 브루어는 이 작품의 세트가 바로 남성의 세계라고 말한다. ‘남성들이 스스로 거대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집에서 ‘완고한 남성 우월주의’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금발 머리를 틀어 올린 ‘키 큰’ 노라는 남편 앞에서 연신 눈을 깜박이며 호들갑을 떤다. 반대로 130cm가 안 되는 ‘키 작은’ 남편은 우뚝 솟은 콧날과 앙다문 입술로 위엄을 보인다. 침대도 탁자도 피아노도 모두 작은 남자 키에 맞게 조그마하게 설계돼 있고, 아내는 무릎을 굽힌 채 남편의 눈을 맞춘다. 서로 보호받기를 원했지만 수평적 관계의 끈을 찾지 못해 결국 어긋난 관계를 두 남녀의 극명한 키 차이로 보여준다. 리 브루어 연출의 ‘인형의 집’은 국내에서 나흘 동안 공연된다. 변인숙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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