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새“울릉도로,대학으로…난파격이좋다”

입력 2008-03-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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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새'란 이름을 지닌 사람. 금난새를 만난 날은 때마침 대학 신입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그와 그가 이끄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장소는 명륜동 성균관대학교의 600주년 기념관 새천년홀. 레퍼토리는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아리아들이었다. 금난새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이다. 그의 동선은 늘 음악계의 화제가 되고, 대량의 추종자와 안티를 양산한다. 지난해 환갑을 보낸 그는 ‘금난새식 실험’에 푹 빠져 나이 먹어가는 걸 잊고 산다. 남들로부터 ‘삼성을 그만두고 중소기업으로 가는 꼴’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KBS관현악단을 떠나 수원시향으로 훌쩍 둥지를 옮겼던 그가 국내 최초의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 필하모닉을 창단한지 올해로 10주년. 이후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유라시안과 함께 제주뮤직아일 페스티벌, 포스코센터 로비콘서트, 캠퍼스 음악회 등 금난새가 아니면 가히 상상하기 힘든 신선하고 기발한 연주회들을 잇달아 개최해 왔다. 지난해 9월 경기필하모닉을 이끌고 울릉도를 방문하는 파격을 선보였던 금난새는 이날 유라시안 오케스트라와 함께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연말까지 10개 대학을 찾아 연주하는 <포스코 캠퍼스심포니페스티벌>에 돌입했다. 대장정의 첫 날 일평생 자신의 수식어로 따라붙던 ‘상임지휘자’ 대신 ‘음악감독 & CEO'를 명함에 새겨 넣은 금 씨를 만나기 위해 지휘자 대기실을 찾았다. 금난새 씨를 만난 것은 스포츠 전문지이면서 동시에 종합 대중문화지를 지향하는 스포츠동아의 과감한 실험이었다. 이날, 금난새의 실험과 스포츠동아의 실험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느낌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금난새 씨 특유의 어법과 말투를 그대로 살렸다. 인터뷰 약속 장소인 지휘자 대기실에 들어서니 깔끔한 정장 차림의 그가 예의 환한 미소로 맞는다. 인터뷰 첫 머리에서 그가 물었다. “스포츠신문에서 왜 저를 … ?” “선생님께선 스포츠 경기를 보시다가 기막힌 장면이 나오면 뭐라고 하시죠?” “예술이다?”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 스포츠는 좋아하시나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어요. 역도. 사람들이 놀라죠. 진짜에요. 왜냐? 그게 음악이거든요. 드는 순간의 기합과 집중. 역도선수가 역기가 놓인 곳을 향해 혼자 걸어 나가서 엄청난 집중력으로 역기를 들어올리기까지의 긴박한 과정은 무대에 오르는 지휘자하고 똑같다고 생각해요. 이츠 리얼리 아트.” - 그러는 선생님께서는 역도선수에 비해 너무 가벼운 걸 들고 계신 거 아닌가요? “(지휘봉을 들며) 이거요? 하하! 이츠 헤비 원, 헤비 원(무거워요).” - 요즘 많이 바쁘시죠? 우선 옛날이야기를 좀 해보기로 하죠. 젊어서 유학 생활을 독일에서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휘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엔 지휘과가 없었어요(그는 작곡을 전공했다). 결국 대학에서 동아리를 만들어 독학을 했지요. 그런데 라이센스가 필요하잖아요? 유학을 가긴 가야겠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어요. 스웨덴에 청소년음악연맹이란 것이 있었고 마침 내가 젊은 이사로 등록이 되어 있었는데 거기 회의에 참석했다가 베를린으로 갔죠. 그리고 눌러앉아버린 겁니다.” 학교에서는 두 사람의 교수를 금난새에게 추천해 주었다. 그는 ‘이름이 좀 더 음악가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알렌도프가 아닌 라벤슈타인 교수를 선택했다. 무작정 전화를 했는데 다음날 자기 집으로 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하다. 1977년, 유학 생활 3년 만에 그는 카라얀 국제콩쿠르에서 드뷔시의 '라 메르(바다)'를 지휘해 3위 입상했다. 지금에야 한국의 음악가들이 각종 세계콩쿠르에서 1등을 들었다 놨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의 입상은 국가적인 쾌거였다. 단박에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지휘자로 신분이 격상되었다. -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1979년이었죠?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국립교향악단의 최연소 지휘자로 부임하셨는데요. 단원들과의 관계는 괜찮았습니까? “쉽지 않았어요(이 대목에서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30, 40년 전 얘기잖아요. 지휘자 하면 다들 원로라는 개념이 박혀 있었지요. 그때 내가 서른셋이었던가? 아무튼 단원의 90% 아니 95%가 나보다 선배들이었죠. 하물며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도 계셨으니. 아시다시피 음악계라는 게 다 사제지간으로 되어 있잖아요. 선후배 개념도 세고.” ‘단정하고 빈틈없는 금난새’의 이미지는 이때 거의 만들어졌다. 음악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옷 한 벌 입는 데에도 신경을 듬뿍 썼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미스테이크’를 보이지 말아야 했다. - 지휘자로서의 금난새는 단원들에게 어떻게 비춰질 것 같습니까? “저는 약간 카멜레온? 그게 나쁜 게 아니거든요. 기량이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있는 반면 청소년 오케스트라도 있고 … 서로 다르잖아요? 대상에 따라서 어떻게 잘 리드해 나가느냐가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저 사람은 무섭기만 하다? 이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유학 시절에 로린 마젤, 하이팅크, 무티, 줄리니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리허설을 거의 다 봤어요. 리허설을 보는 게 최고의 공부거든요. 그때 느낀 게 많아요. 콘서트하고 달리 리허설에서는 지휘자들의 모습이 다 드러나니깐. 마젤 같은 경우 귀가 좋지만 인간미가 없다고나 할까. 나이가 드니 좀 달라지긴 했지만. 하여튼 별 일이 많아요. 네 살 때 싸워서 악수조차 안 하는 사람들도 있고.” - 지휘를 할 때 제일 중시하는 파트는 어디입니까? “스트링(현)이죠. 현은 새로 치면 날개랍니다. 일이 많잖아요. 날개를 흔들어야 새가 날아가는 거잖아요. 목관은 이목구비의 펑션(기능)이 있는 거고 … 현 중에서도 저음을 내는 콘트라베이스는 발이죠. 기동성을 책임집니다. 오케스트라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단원들한테 종종 하는 얘기가 있어요. 공을 잘 차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안목’이다. 시야가 넓어져야죠. 팀이 이겨야지 자기가 이기는 거 아니잖아요?” - 좋은 독주자가 꼭 좋은 오케스트라 단원이란 법은 없단 말씀이신가요? “이그젝틀리(맞아요)! 우리나라 음악교육이 문제에요. 우리 애들 수준이 높아요.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불구, 장애에요. 하나만 잘 하죠. 축구로 치면 왼발을 못 쓰는 선수라고나 할까. 혼자서는 잘 하는 데 오케스트라에서 음정을 어떻게 맞추느냐, 이런 건 해보지 않아요.” - 기량을 떠나 좋은 오케스트라와 나쁜 오케스트라의 궁극적인 차이는 뭘까요? "허허허, 그걸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구요. 또 센서티브(민감)해서 … 활자화되긴 좀 그래요. (이 부분에서 그는 한동안 머뭇거렸다) 그럼 베를린 필이 모델이라고 할까요? 최고의 오케스트라죠. 우리가 베를린 필을 가질 수는 없지만 깔려있는 태도, 정신은 배워야죠. 내가 단원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여기 계란이 하나 있습니다. 밖에서 깨면 프라이가 되지만 안에서 깨면 병아리가 되는 거에요. 솔리스트도 그렇고 오케스트라도 보면 꼭 남의 음악하듯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내가(지휘자) 바운더리(영역)를 가지지만 결국 연주자들 스스로 그 속내를 끌어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걸 잘 안 해요. 단원은 파출부가 아니에요. 마이 홈, 마이 뮤직이라고 생각해야죠. 좋은 오케스트라는 나쁜 지휘자가 와도 돈 워리. 수준이 있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최선을 다하는 거죠." - 좋은 연주를 위해 단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얘기했어요. 사람들이 우리의 연주를 통해서 작곡가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최고의 찬사는 '정말 작품이 위대하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거에요. '(오늘 공연할) 브람스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우리 역할이죠. '유라시안이 잘 하는 구나' 소리가 나오면 그건 우리가 모자란 것이라고 했어요." 인터뷰를 마친 그는 저녁 공연을 위해 단원들과 무대에서 리허설을 가졌다. 정장을 벗어던진 그는 편해 보이는 붉은 셔츠차림으로 '역기처럼 무겁다는'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 앞에 섰다. 긴장감이 전신을 아득하게 조여 오는 순간, 마침내 그의 지휘봉이 허공에 선 하나를 그었다. 팀파니의 강렬한 연타에 맞춰 중후하고 느린 서주가 시작됐다. 그가 팔을 뻗으면 현이 넘실거렸고, 두 주먹을 움켜쥐면 금관이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이 순간, 금난새는 오케스트라였고, 오케스트라는 곧 금난새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공간의 한 복판에서, 1876년의 브람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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