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에분필로적어간사랑,연극‘그자식사랑했네′

입력 2008-08-14 14: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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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비 오는 날 중이 염불하듯 이별한 여자가 "아리랑, 아리랑" 거리며 독설을 퍼붓는다. 아무리 “발병 나라”고 말해도 이 여자의 욕은 욕이 되지 못 한다. 우리 민요 ′아리랑′은 떠난 임에게 "발이나 부러져라! 발병나라" 악담하는 게 아니다. 십리도 채 걷기 전에 제 발로 돌아오라는 속뜻을 반대로 노래했다. 대학로 창작 연극 ′그 자식 사랑했네′가 그렇다. 마치 비꼬는 양 후회하는 게 아니다. 그 자식을, 그 못된 자식을, 나를 아프게 하고 눈물만 쏙 빠지게 만든 사람을 그래도 ′사랑했다′는 고백이다. 그를 사랑했음에 나 행복했노라! 사람과 시간은 가고 없지만 추억은 남았다. 소극장에 오붓이 모여 앉은 관객을 증인으로 삼아 주인공 미영이 선언한다. 그 자식‘이’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식‘을’ 사랑한 사실만은 맞다. "발랑 까지고" 싶었다고 칠판에 낙서를 해 둔 미영이는 80분 동안 매우 당당하다. "핏줄이 살짝 튀어나온 그의 팔을 보면 참 섹시하다"고 느껴서 사랑에 빠졌고, 그의 얼굴이 영화배우 박해일을 닮아 뿌듯했다. ′그 자식 사랑했네′는 20대 후반 젊은이, 강북의 보습학원 국어 강사와 영어 강사의 연애 스토리다.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임용 고시에 두 차례 낙방한 정태와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미영이 각자의 속내를 드러내며 정을 나누다 삐걱거리고 결국 헤어지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별반 특이할 게 없지만, 둘이 함께 나누는 사건들은 세심하고 특별하다. 두 명밖에 안 되는 인물이 칠판이라는 소품 하나로 앙증맞은 이야깃거리를 푸짐하게 늘어놓는다. 고백도 했고 사랑도 했고 이별도 했다. 할 건 다 했다. 특히 골목길, 학원 강의실, 대학캠퍼스, KTX 열차 등 모든 배경이 칠판 두 개면 해결된다. 칠판에서 휴지를 뽑아 쓸 수도 있고, 칠판에서 컴퓨터 전원을 끌 수도 있다. 심지어 생일 케이크 촛불도 볼 수 있다. 마술이 아니다. 주인공이 일일이 분필로 그리고 지우개로 지워가며 관객을 웃음으로 이끈다. 세심한 세트 활용으로 소극장의 매력을 한껏 발휘했다. ‘그 자식 사랑했네’는 대학로에서 데이트를 즐길 연인들, 친구와 긴 이야깃거리를 얻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공연을 보고 나서 밤늦도록 추억을 되짚으며 수다를 떨어도 좋다. 아무리 미래가 불투명해도 사랑만은 투명하다고 믿는 20대 힘든 백수, 백조! 옛 사람이 그리운 중장년까지 연령에 국한되지 않고 신나게 볼 수 있다. 단, 오래된 연인의 배신에 치를 떤다거나 삼각관계에 얽혀 현재 매우 심란한 독자들은 보지 않는 게 좋다. “그대와 난 불장난을 시작”했다는 015B 7집 ‘성냥팔이 소녀’ 가사 같은 상황이 무려 1시간 넘게 진행된다. 거칠게 보면 9년간 한 여자를 만나던 남자가 애인 몰래 ‘거침없는 사랑’에 빠져 양다리 걸친 얘기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에게 두 가지 선물이 덤으로 준비돼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공연장에 울리는 펑크 음악에 귀 기울여 보자. 밴드명도 특이하고 가사도 특이한 록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그 자식 사랑했네’ 가 흐른다. 조금 적극성을 발휘하면 직접 조연도 맡는 행운도 기다린다. 연기력이 필요한 역할은 절대 아니니 걱정은 접어두자. 한 명의 관객이 과학 강사, 반장, 학원 원장 등을 모조리 연기한다. 조연을 맡고 싶으면 앞자리에 앉아 손을 들면 된다. 공연이 끝나고 크라제버거 상품권을 무료로 받는다. Clip! 1. 공연일시 : 7월 3일~9월 28일 2. 공연장소 : 대학로 아츠플레이씨어터 2관 3층 3. 티켓가격 : 일반 2만원, 대학생 1만5000원 (만 19세 이상 관람가) 4. 문의 : 02-747-4703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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