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구의 손끝이 나비처럼 반상을 날아다닌다.
승리를 예감, 아니 확신한 손놀림이다.
프로도 사람이다. ‘어떻게 두어도 이길 수 있다’라는 마음이 들면 손속이 넉넉해진다. 승부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물러선다.
물론 그러다 뒤집어지는 바둑도 많다. 하지만 이런 바둑은 얘기가 다르다. 상대만 의식하지 않는다면 콧노래라도 나올 판이다.
<실전> 흑1이 좋은 수.
자칫 <해설1> 흑1로 잇는 수 같은 것을 두게 되면 일거에 바둑이 망가진다. 백은 2로 차단한 뒤 4로 끊을 것이다. 이건 볼 것도 없이 역전이다.
<실전> 백12로 두어 가는 박영훈의 손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이제라도 ‘승부’를 해보려면 <해설2> 백1 같은 수를 두어 어떻게든 백을 살려내야 한다. 하지만 흑2 정도로도 이 백 대마는 삶을 자신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우변도 문제. 흑이 A 같은 곳을 둔다면 우변의 백 대마도 위험하다.
사방이 쫓기는 바둑은 피곤하다. 날은 저물어 가고, 추격병들의 말굽소리는 가까이 들린다. 슬슬 결정을 할 때가 왔다.
투항할 것인가, 장렬하게 목숨을 다할 것인가.
박영훈은 십여 수를 더 두고는 기꺼이 돌을 던졌다.
무기력한 패배. 초반의 실수 한 번이 너무 컸다.
이후 단 한 번도 우세를 맛보지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지고 말았다.
입에 쓴 만큼 이 바둑은 두고두고 박영훈에게 약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영구가 박영훈을 예상 밖으로 가볍게 깨고 4강에 올랐다. 이창호와 홍성지 판의 승자가 그의 다음 상대가 될 것이다.
<175수, 흑 불계승>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
글|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