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 사커에세이] 우리들의 전설 이영표…그대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입력 2013-10-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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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동아일보DB

이영표. 동아일보DB

그를 사석에서 처음 만난 건 1999년이다. 당시 건국대학교 재학생으로 막 이름을 알릴 때였다. 앳된 외모와 호리한 체구 때문에 얼핏 약해보였지만 그라운드 안에서는 철인이었다. 얘기를 섞어보니 평범한 선수는 아니었다. 생각이 깊었다. 상대 말을 귀담아 듣는 배려심도 있었다. 아무 말이나 함부로 내뱉지 않는 진중함도 갖췄다. 밝은 성격으로 매사 긍정적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는 그런 선수였다. 지금도 당시와 달라진 건 없다.

2000시드니올림픽을 전후로 대중적인 사랑을 얻었다. 주특기인 ‘헛다리짚기 드리블’을 할 때면 팬들은 열광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영리한 플레이도 돋보였다.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력도 탁월했다. 2002한일월드컵 때부터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한국대표팀 부동의 왼쪽 풀백으로 경쟁자는 없었다. 지금도 그를 뛰어넘는 후배는 나오지 않았다. 정상에서도 자만하지 않았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태극마크를 달고 뛴 10여 년 동안 기복이 없었다. 성실함을 무기로 한결 같은 플레이를 펼쳤기에 그의 존재만으로도 듬직했다.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불렀다. 네덜란드로 날아갔다. 단숨에 팬들을 매료시켰다. 다음 코스는 세계 최고의 무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였다. 거기서도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뤄 살아남았다. 한국 수비수가 최고의 무대에서 그렇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었다. 이후 독일과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미국 무대에서 뛰며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타고난 승부욕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 철저한 자기관리로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재를 과시했다.

‘초롱이’ 이영표(36·밴쿠버) 이야기다. 그가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2011년 초 대표팀에서 은퇴한 뒤 이후 3년간 현역 생활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내려놓았다. 28일 콜로라도와의 미국프로축구 정규리그 홈경기를 통해 ‘선수 이영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그는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가는 곳마다 팬들은 물론이고 동료 선수나 구단직원 모두에게 인정받은 걸 보면 분명 행복한 선수였다. 아울러 팬들을 행복하게 해준 선수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뤘다고 할만하다.

이영표의 측근에 따르면 이영표가 27년간의 선수생활 중 가장 좋았을 때가 국가를 위해 헌신했을 때와 돈을 받지 않고 선수생활을 했을 때라고 한다. 이영표다운 대답이었다. 태극마크의 무게감을 알기에 모든 걸 바칠 수 있었고, 아마추어의 순수함을 알기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마땅히 이뤄내야 할 경기를 제대로 못했을 때라는 게 측근의 전언이다. 쉽게 말해 원하는 만큼의 승부가 안 났을 경우인데, 예를 들면 2010년 5월 열린 한일전에서 2-0으로 이겼지만 스코어를 더 벌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한단다. 그만큼 승부에서는 철저했다.

그라운드에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건 큰 아쉬움이다. 팬들도 레전드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박수로서 슬픔을 달랬다. 밴쿠버의 마틴 레니 감독은 “그는 전설이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영표는 우리들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인생 항해를 떠난다. 축구행정가든 아니면 지도자든 어떤 항로를 잡든 그의 앞날에 밝은 햇살만이 비추길 기원해본다.

스포츠 2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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