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링거투혼 권혁…바람의 언덕에 오르는 ‘희망불꽃’

입력 2015-08-21 05:45: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올 시즌 ‘한화 돌풍의 주역’이자, ’불꽃 투혼의 상징’이 된 권혁은 최근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휴식을 취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시즌을 달려온 그는 잠시 숨고르기를 한 뒤 다시 마운드를 올라 희망의 불꽃을 태울 준비를 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시즌 투구수 1680개 개인최다…방전된 체력
-병상에서 “괜찮아졌다”며 또 순박한 웃음만
-몸 추스르고 다시 바람부는 언덕에 오를 채비
-암흑기 견딘 한화팬들에게 ‘희망의 불꽃’ 되길


“괜찮습니다. 꼭 누가 밟은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는데….”

잠겨 있는 목소리, 여전히 부어 있는 눈과 얼굴, …. 한화 권혁(32)은 17일과 18일 이틀간 남몰래 링거를 맞으며 병원 신세를 졌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그 목소리와 얼굴이 더 안쓰러워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또 “괜찮다”고 한다. “좀 쉬고 났더니 나아졌다”며 순박하게 웃는다.

올 시즌 내내 들었던 “괜찮아?”라는 안부인사. 그는 그럴 때마다 “힘들면 내가 힘들다고 말할 것이다. 던질 만하니까 던진다”며 큰소리를 쳐왔다. 그러더니 결국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홀로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주목 받던 시절은 있었지만, 한번도 주인공이 돼보지 못했던 권혁의 야구인생. 한화 유니폼을 입은 뒤 “원 없이 공을 던져보고 싶다”더니 정말로 원 없이 공을 던지고 있다. 20일까지 올 시즌 던진 투구수는 1680개. 2002년 프로 데뷔 이후 한 시즌 자신의 최다투구수 기록이다.

선발(9경기)과 구원(28경기)을 오가던 2004년의 1510개를 훌쩍 넘어섰다. 승(8승)도, 패(10패)도, 세이브(15세이브)도, 투구이닝(92.2)도, 상대 타자(406명)도,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한 시즌 최고 기록이다. 아직 던져야할 날이, 던져야할 경기가 더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의 올 시즌 역할은 아직 마침표가 아니다.

그는 시즌 개막과 동시에 스포트라이트의 한 가운데에 섰다. 서른두 살에 찾아온 야구인생의 봄날. 한화 돌풍의 주인공이 됐고, 불꽃 투혼의 상징이 됐다. 권혁의 역투는 오랜 암흑기, 질곡의 어둠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던 한화 팬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촛불이었다. 팬들은 그래서 그에게 환호했고, 그는 자신의 등 뒤로 들리는 팬들의 뜨거운 염원을 담아 혼을 던졌다.

“어떻게 보면 내 위치나 우리 팀 위치나 같은 선상에 있다고 봐요. 나도 바닥에 떨어졌다가 또 다시 뭔가를 찾아가고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거고, 우리 팀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거고…. 나도 여기서 잘 되고, 팀도 동반상승하면 좋잖아요.”

스프링캠프 때 태어나서 처음 코피를 흘려봤다. 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옥훈련을 견뎌냈다. 그 바닥의 외로움과 그 바닥의 슬픔을 알기에, 그는 시즌이 시작된 뒤 시도 때도 없이 바람부는 언덕 위에 올라 혼을 던졌다.

이기는 경기,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경기, 이기고 싶은 경기, 이겨야 하는 경기, 이길지도 모르는 경기…. 바람이 몰아쳐도 마운드에 올랐고, 비가 흩날려도 공을 던졌다. 팬들 사이에선 ‘내일 한화 선발투수가 누구인지 몰라도, 내일 한화 불펜투수는 누구인지 안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는 줄기차게 승부의 언덕으로 호출됐다.

마치 내일 한줌의 재가 될지언정 오늘 자신 한 몸 불태워 주변을 밝히는 촛불처럼, 매 경기 그는 이를 악물고 악을 쓰며 한화의 앞날을 밝혀왔다.그러나 무쇠 같은 체력도, 강철 같은 투혼도, 사람인 이상 쉬어갈 타이밍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올 시즌 초 ‘희망의 이름’이었던 권혁은 어느 순간부터 ‘안쓰러움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 그가 무거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몸보다 마음인지 모른다. 지난 주말에 3일 연속 자신이 통타를 당하며 팀이 연패를 당하기 시작했고, 링거를 맞느라 쉬는 시기에 팀의 연패는 더 길어졌다. 20일까지 7연패. 한화에 온 뒤 책임감이 더 강해진 그는 그래서 팀의 연패가 오롯이 자신의 탓인 양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한화가 여기까지 온 것도 그 덕분임을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마당에….

높은 곳은 항상 바람이 분다. 높은 곳은 항상 외롭다. 그래서 그라운드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투수는 홀로 강해져야 한다. 투구 직전, 그라운드에 있는 8명의 야수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지만, 투수는 유일하게 꼿꼿이 서서 바람과 당당히 맞서야하는 위치다. 힘들어도 굽히면 안 되고, 괴로워도 티를 내면 안 된다. 야구는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야 시작되는 스포츠. 그래서 그 순간, 모두가 언덕 위에 서 있는 투수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심신을 추스른 권혁이 다시 불꽃을 들고 ‘바람의 언덕’에 오를 채비를 시작하고 있다. 한화 야구가 한여름 고비 길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꺼질 수는 없다.

꼴찌를 응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오랜 세월 숨죽여 살아왔던 한화 팬들은, 권혁이 그들의 찢겨진 마음을 달래주는 희망의 불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응원하고 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