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그때 이런 일이] 정지영감독, 저작인격권 소송

입력 2015-12-23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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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12월 23일

‘삭제, 변경, 축소….’

영화와 가요 등에 대한 사전검열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그 상징적인 단어라고 하면 무리일까. 물론 다양한 사회비판적 은유를 허용하지 않던 시대의 이야기다. 대중이 작품을 접하기도 전에 창작자의 본래 의도는 ‘빨간펜’에 의해 삭제됐고, 그 수위의 정도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그 제도에 의해서만 창작의 본뜻이 왜곡되는 건 아니었다. 상업적인 혹은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상식 밖의 일들이 때로 벌어지곤 했다.

1992년 오늘, 영화 ‘하얀 전쟁’의 정지영(사진) 감독이 비디오 제작사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얀 전쟁’의 비디오 제작사가 자신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와 함께 해당 제작사 관계자를 형사고발했다.

정지영 감독이 비디오 제작사가 자신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하얀 전쟁’의 비디오를 제작, 출시하면서 125분 분량의 영화를 11분이나 잘라냈다고 밝혔다. 주요 장면을 무단 삭제한 것은 물론 심지어 일부 대사까지 바꿨다고 정 감독은 덧붙였다.

결국 비디오 제작사는 이듬해 1월 초 정지영 감독에게 시중에 배포된 ‘하얀 전쟁’의 비디오 테이프 3만5000개를 전량 회수해 새롭게 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뒤이어 2월 일간신문에 “정지영 감독의 동의 없이 삭제·수정을 가해 본의 아니게 저작자의 창작의도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고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스태프와 연기자 등에게 사과했다. 이에 정 감독은 소를 취하했다,

‘하얀 전쟁’은 작가 안정효의 소설을 원작 삼아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이 10여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로서는 대규모였던 20억원의 제작비로 실제 베트남에서 로케한 영화는 참혹한 전쟁과 그 속에서 자생하는 집단적 폭력을 고발하면서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참전병사들의 이야기였다. 안성기, 이경영, 독고영재, 허준호, 심혜진 등이 출연한 영화는 1992년 한국영화 흥행 3위를 기록하며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안성기), 대종상 남우조연상(이경영) 도쿄국제영화제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받는 등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하얀 전쟁’의 수난은 많은 영화가 일부 비디오 제작사들의 무단 삭제 등 오랜 시간 관행처럼 굳어진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지나간 시대의 씁쓸한 풍경을 말해준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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