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지구를 지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입력 2016-05-12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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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인 ‘지구를 지켜라’는 범우주적코믹납치극을 표방한 독특한 연극이다. 웃음과 진지함의 절묘한 줄타기를 보여준 병구 역의 정원영(왼쪽 아래)과 순이 역을 맡아 망가지는 연기를 선보인 함연지(맨 위쪽 사진).사진제공|PAGE1

■ 연극 ‘지구를 지켜라’


걸작·망작 평가 갈리는 영화 원작
기괴한 무대와 블랙코미디의 조화
정원영, 희극·비극 절묘한 줄타기


‘범우주적코믹납치극’을 표방한 연극이다. 2003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연극으로 재활용했다. 장준환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한국 영화사의 대표적인 ‘저주받은 걸작’으로 꼽힌다. 개봉 당시 7만3000명 관객 수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들고 퇴장했지만 뒤늦게 “진정한 걸작”, “시대를 앞선 작품”이라는 극찬을 들으며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영화이다. 2013년에는 개봉 10주년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걸작과 망작이라는 냉온탕을 오가던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연극버전은 어떨까. 일단 크리에이티브팀의 면면만으로도 동공이 확대되는 기분이다. 한국 공연 연출계의 거장 이지나가 연출을 맡았고 CJ문화재단의 예술감독 조용신이 대본을 썼다. 그로테스크하면서 곳곳에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무대는 무대디자이너 서숙진의 작품이다. 연극이지만 25곡의 음악 넘버가 들어갔다. 바흐의 푸가 변주곡을 제외한 24곡을 음악감독 23(김성수)이 작곡했다.

극의 줄거리는 영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원작을 티 나게 손대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게 무대화(그것도 소극장이다) 시킨 솜씨에서 ‘진짜 프로’들의 실력을 엿볼 수 있다. 20대 청년 병구는 전형적인 약자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죽도록 고생만 하며 자랐다. 힘도 없는 놈이 독기마저 부족해 늘 구박받고, 맞으며 살았다. 병구는 조력자 순이와 함께 유제화학 강만식 사장을 납치해 강원도 태백에 있는 자신들의 은신처에 가둔다. 병구는 강사장이 안드로메다 PK-45 행성에서 온 지구 총사령관이라 믿고 있다. “외계인임을 인정하고 행성의 왕자와 접선할 장소를 불어라”며 강만식을 고문한다. 병구는 6일 후 개기일식이 올 때까지 왕자를 만나야(정확히는 왕자를 만나서 죽여야)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한편 강력반 추형사는 강만식 납치사건의 책임자로 병구와 순이를 지목하고 추격하기 시작한다.


● 살짝 모자란 듯한 웃음이 아쉬워

황당무계한 스토리지만 이런 장르의 작품은 ‘그러려니’하고 봐야 한다. 눈과 어깨에 힘을 빼면 비로소 이 작품이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들이 스르르 마음에 젖어든다.

묘하게도 “설마 저런 사람들이, 저런 일이 있을 수 있겠어?”싶다가도 극이 중반 이후로 흐르면서는 어느 틈에 “차라리 저렇게 되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심지어 전율이 느껴지는 엔딩 장면마저 그렇다. 웃기면서도 에스프레소를 원샷해 입에 머금은 듯 쓰다.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이 전면에 내세운 ‘코믹’이다. 조금 더 웃겨주었으면 좋겠다. 빵빵 터지는 부분이 지금보다 1.5배 정도면 딱 좋을 것 같다. 블랙코미디 계열답게 웃음의 질에 신경을 많이 쓴 듯 보이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웃음이 클수록 이 작품이 지닌 어두움이 짙어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원영의 병구는 희극과 비극의 대비가 뚜렷해 캐릭터가 잘 살았다. 강만식 사장 역의 강필석은 악덕 기업인치고는 외모가 너무 반듯해 미워하기 쉽지 않았지만(하하!) 병구의 코믹을 노련하게 지원했다. 멀티맨 육현욱은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잘 어울렸다. 지적장애를 지닌 서커스단 출신의 여인 순이 역의 함연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연기를 보여주었다. 시원하게 망가졌다. 함연지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어 반가웠고, 신기했다. 5월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공연한다. 지구를 지킬 날도 17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조금 서둘러야겠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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