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스포츠영웅 차범근이 아주 특별한 이유

입력 2017-12-01 05: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29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2017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선정된 차범근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헌액식에서 차범근 전 감독이 헌액패를 받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조병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소년은 마냥 축구가 좋았다. 발에 착 감기는 축구공의 탱탱한 느낌, 쌩쌩 내달릴 때 살갗에 스치는 그 오돌토돌한 바람의 촉감, 힘껏 찬 공이 그리는 희망의 포물선을 보면서 큰 꿈을 키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한 건 중학교 3학년 때다. 요즘과 비교하면 한참 늦은 나이다.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곧바로 운동부가 없어졌다. 눈물이 났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전학을 통해 늦깎이 선수가 됐다. 다른 바람은 없었다. 공을 찬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2학년 때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되며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날개를 달자 거침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그렇게 승승장구한 소년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유럽무대에 진출했다. 거기서도 당당했다. 땀의 가치를 믿었던 그는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고, 마침내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차범근(64).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선정된 수줍음 많던 그 소년이 29일 대한체육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한국스포츠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역대 10번째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이자 축구인으론 처음이다. 스포츠영웅의 50년 축구인생에는 희로애락이 녹아있다. 언제나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패했다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인생 마디마디엔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그걸 딛고 일어섰기에 오늘의 영광도 있었다.

국가대표 선수 시절 차범근(오른쪽). 사진제공|FIFA



#칭찬과 상, 그리고 자신감

그는 축구를 미친 듯이 했다. 캄캄한 밤에도, 새벽에도 쉴 틈이 없었다. 목표는 단 하나, 태극마크를 달고 성공하는 것이었다. 신체조건이 좋은데다 기량이 쭉쭉 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전문가들의 눈에 띄었다. 경신고등학교 은사는 장운수 감독이었다. 장 감독은 칭찬 한마디로 제자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장 감독은 “차범근은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다”고 장담했다. 그게 큰 힘이 됐다. 차범근은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장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하니까 신날 수밖에 없었다. 칭찬은 에너지다. 칭찬을 해주면 서로 간에 신뢰도 생긴다”고 말했다.

상은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됐다. 고려대학교 1학년인 1972년, 국가대표선수가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축구공을 만지고, 폼 나는 축구화를 신었다. 성장은 가팔랐다. 그해 백상체육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 상은 훗날 차범근이 자신의 축구상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축구선수로 처음 받은 상이었다.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정을 받는다는 기분이고, 이것은 굉장한 자신감이다. 상은 선수에게는 힘이자 꿈이고 용기다”고 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고, 그리고 한눈팔지 않고 외길 인생을 걸을 수 있었던 건 그 상이 준 자신감 덕분이다.

스포츠영웅 헌액 또한 그에겐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만 18세에 받은 신인상은 내 축구 인생의 디딤돌이었고, 이 상은 마침돌이 됐다. 지금 나이가 60대, 그것도 중반이 됐다. 이제 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스포츠영웅 선정은 내게 마지막 사명인 축구를 위해서 더 일하라는 뜻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할 당시 차범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불굴의 도전정신

그는 20대 중반에 이미 한국은 물론 아시아 무대를 평정했다. 197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박대통령컵 개막전 말레이시아와 경기에서 1-4로 뒤진 경기 막판에 5분간 3골을 터뜨린 장면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골게터였는지를 대변해준다.

1970년대 당시 국내엔 프로리그가 없었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돈을 벌어봤자 한계가 있었다. 돈도 벌고 싶고, 축구도 하고 싶었다. 1978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독일행을 꿈꿨다. 도전 정신은 그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이런저런 기회가 왔지만 쉽지는 않았다. 팬들의 반응도 찬반으로 나뉘었다. ‘국보 유출’이라는 시각과 나가서 선진축구를 배워야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대표팀 성적이 중요했던 축구협회는 다소 부정적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절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극적인 반전은 1978년 12월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방콕 현지에서 일어났다. 차범근은 대한체육회 및 대한축구협회 관계자와의 담판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로서는 설사 실패를 한다 해도 잃을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라도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다”고 했다. 방콕 담판으로 전설의 길은 이어졌다. 이처럼 그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또 도전한 그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의 스포츠영웅을 만들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감독 당시 차범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실패의 쓴맛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그에게도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는 1997년 1월 월드컵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1996년 12월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으로 대패해 팬들의 불만은 극해 달해 있었다. 프랑스월드컵 예선전 시작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걱정과 달리 출발은 좋았다. 대표팀 운영의 선진화를 꾀하는 등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월드컵 본선 4회 연속 본선진출이라는 국민적인 희망을 이뤄냈다. 하지만 본선무대에서 참패를 당했다. 조별예선 첫 상대인 멕시코에 역전패를 당한데 이어 두 번째 상대 네덜란드에 0-5로 진 뒤 곧바로 경질됐다. 축구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엎친 데 덮친 사건이 터졌다. 월드컵이 끝난 그 해 여름, 그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K리그 승부조작 사실을 언급했다. 축구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축구협회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상벌위원회를 통해 5년간 지도자 자격정지의 징계를 내렸다. 수십 년간 쌓은 명성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듯 했다. 그 후 한참 동안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뒤로 숨지 않았다. 다시 팬들 앞에 섰다. 한국축구를 위해 할 일이 남았다는 사명감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후 K리그 지도자로서 승승장구하며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 당시 그의 승부조작 발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K리그의 순위가 결정된 뒤에 서로 봐주는 경기를 했던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0여년이 흐른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이 일어나자 축구인들은 크게 후회했다. 차범근의 승부조작 발언 때 축구협회가 좀 더 꼼꼼하게 조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당시 짧은 경고음이라도 울렸다면, 그처럼 참혹한 사건은 막을 수 있었다고 믿었다.

사진제공|대한축구협회



#유소년에게서 찾은 희망

그는 독일생활 10년 동안 한국축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마침내 찾아낸 게 유소년축구에 대한 투자였다. 어릴 때부터 공을 가지고 놀 줄 알아야 축구에 대한 감각이 생긴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나는 어렵고 배고픈 시절을 보내며 좋은 축구를 배울 수는 없었지만 내 후배들에게는 좋은 환경에서 동기부여를 해주면서 축구를 할 수 있게 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가 1990년부터 자비를 들여가며 축구교실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축구교실은 한국축구를 개선하기 위한 모델이라는 확신도 가졌다.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유소년에 대한 애정과 투자는 현재 진행형이다.

축구상도 마찬가지다. 1988년에 제정된 축구상은 계속해서 규모를 키워왔다. 29년 동안 총 180명을 배출했다. 그 중 이동국(4회), 박지성(5회), 기성용(13회) 등이 수상했다. 축구교실이 유소년의 기본기나 감각을 위한 장치라면, 축구상은 심리적인 요인을 끌어올리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450g의 축구공에 모든 인생을 건 차범근. 그는 “나는 평생 축구만 했다. 축구는 내 삶이다. 나의 모든 것은 축구에 있다. 축구는 건강한 사람,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국가를 만들어준다. 이건 축구 속에 담겨져 있는 오묘한 진리다. 그리고 가정, 사회, 국가를 유지하는데 축구가 기여한다. 그만큼 소중한 게 축구다. 축구에 미쳐서 평생을 이렇게 살고 있는데,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천생 축구인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