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 ‘책상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그 대사가 사실이라니

입력 2018-01-08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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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영화 ‘1987’

박종철은 왜 남영동 대공분실에 갔나
-선배 박종운 행방 캐묻기 위해 물고문

4·13 호헌 선언은 무엇인가?
-간선제로 정권이양…직선제 개헌에 기름


“이십대를 돌아보며 울다”, “30년 전 일기를 다시 읽는다”.

이제 중년이 된 이들이 영화 ‘1987’을 보고 SNS에 남긴 단상이다. 영화는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뒤 그해 6월 민주화 항쟁에 이르는 이야기. 그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에게는 소재 자체만으로도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다. 영화 주 관객층인 20∼30대도 그럴까. ‘1987’의 한 관계자는 “20∼30대 관객이 다른 영화의 평균치보다 많다”면서도 “배경이 된 실제 사건에 대한 젊은 관객의 이해도는 좀 부족한 듯 보인다”고 말했다.

영화 ‘1987’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박종철은 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나?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 박종철은 1987년 1월14일 아침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소속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울 용산구 갈월동 사무실, 일명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서울대 민주화추진위(민추위) 및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화투쟁위(민민투)와 관련해 교내 시위를 주도한 혐의 등으로 경찰에 쫓기던 터였다. 경찰은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선배 박종운(전 한나라당 인권위 부위원장·16∼18대 총선 출마 낙선)의 행방을 캐물으며 그를 물고문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고, 끝내 숨져갔다.

박종철은 1월16일 아침 경기도 벽제화장장에서 “하얀 잿가루로 변해 형의 가슴에 안겨졌”다. “경찰이 마련한 검은색 승용차”에 오른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근 “임진강 지류”에 잠들었다. 아버지 박정기 씨는 “아들의 유골가루를 싼 흰 종이를 풀고 잿빛 가루를 한 줌 한 줌 쥐어 하염없이 샛강 위로” 뿌렸다. “아버지 박씨는 흰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가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통곡을 삼키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이상 동아일보 1987년 1월17일 자 보도)

영화 ‘1987’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허구의 대사인가? 실제인가?

‘1987’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 조작한 박 치안감은 기자들 앞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응?!”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일부 젊은 관객은 이 대사가 극중 스토리 전개를 위한 허구의 대사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실제로 당시 경찰은 1월15일 이렇게 밝혔다.

“치안본부는 박군이 연행된 뒤 오전 9시16분경 경찰이 제공한 밥과 콩나물국으로 아침식사를 조금하다 ‘전날 술을 마셔 갈증이 난다’고 말해 조사관이 갖다 준 냉수를 몇 컵 마신 뒤 오전 10시50분경부터 취조실에서 조사에 들어갔는데 조사가 시작된 지 30분 만인 오전 11시20분경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87년 1월16일 자)

영화 ‘1987’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호헌선언은 무엇인가?

‘1987’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겠다”고 말하는 TV중계 화면이 등장한다. 이에 분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민심에 반하는 권력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젊은 관객에게 장면은 대체로 낯설게 느껴지는 분위기다.

이른바 ‘4·13 호헌 선언’이라 불리는 당시 담화는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을 직접 뽑겠다는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는 것이었다. “고뇌에 찬 결단”이라는 전 대통령의 언급은 유행어가 되어 권력을 풍자했다. 수많은 대학교수들과 단체들이 시국선언문을 내 ‘호헌철폐’ 및 직선제 개헌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앞서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통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명분으로 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신설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정희에게 표를 몰아주는 ‘거수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일명 ‘체육관 선거’의 시작이었다.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12·12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같은 방식으로 1980년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들은 이듬해 다시 헌법을 개정해 국민이 뽑은 선거인단 5000여 명이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해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식 대통령 간접선거 방식을 모방했지만 이미 야권의 정치인과 민주인사들을 무력으로 제거한 뒤였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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