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신의 ‘빙상의 전설’] 강릉선수촌 801동 1903호, 노진규의 절친들이 다시 뭉쳤다

입력 2018-02-14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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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스피드스케이팅대표 노선영.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여자 스피드스케이팅대표 노선영.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평창을 달리는 고 노진규의 사람들

1500m서 자신의 최고기록 선물한 노선영
노진규를 멘토로 따른 심석희·절친 박승희
선수촌서 룸메이트로 만나 꿈의무대 도전



● 4년 만에 동생이 보고 싶어 하던 레이스를 뛴 노선영

고 노진규의 누나 노선영. 그는 지난 12일, 우여곡절 끝에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1500m에 출전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의 행정 착오로 올림픽 출전권을 상실했다가 러시아 선수들의 출전권 박탈로 어렵게 출전권을 얻었다. 애초엔 선수 생활 자체를 포기하려 했지만 주위의 격려와 응원을 받고 많은 고민 끝에 다시 올림픽 출전을 결정했다. 준비 기간이 짧았던 만큼 본인의 최고 기록과는 거리가 있는 기록이었으나 자신의 올림픽 기록을 경신하며 순위도 역대 가장 높은 14위에 올랐다. 물론 순위와 기록이 중요한 레이스가 아니었다. 동생이 그렇게 뛰고 싶어 하던 올림픽 무대, 그리고 동생이 보고 싶어 하던 자신의 레이스를 4년 후에라도 보여줄 수 있었기에 후회 없는 레이스였다.

4년 전 불의의 골육종 수술로 병상에서 소치 올림픽을 지켜보던 노진규는 소치올림픽에 출전한 누나에게 ‘선물 사와. 메달이라도 따와’라는 짧은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다른 경기를 중계하느라 노선영의 경기를 방송사들이 외면하자 ‘누나는 보여주지도 않네’라고 SNS에 섭섭한 마음을 표했다. 그리고 4년 후 노선영은 동생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레이스를 달렸다. 하늘의 노진규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으리라.

故 노진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故 노진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스피드와 쇼트트랙으로 갈라진 남매

노진규가 누나의 영향으로 쇼트트랙 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은 유명하다. 당시 유망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인 노선영의 뒷바라지를 하던 노진규의 어머니는 어린 노진규를 집에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불안해서 ‘너도 한번 스케이트를 타봐라’라고 권유했고, 둘이서 타는 스피드 스케이팅보다 여러 선수가 작은 원을 빠르게 돌면서 경쟁하는 쇼트트랙이 더 재미있다고 느낀 노진규는 누나와는 달리 쇼트트랙을 선택했다.

그렇게 두 남매는 각기 다른 종목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타고난 운동 신경 덕분에 주니어 국가대표 선수에 이어 국가대표가 됐다. 노선영은 2007년 ISU 세계주니어선수권 개인종합을 우승하면서 스피드 스케이팅 중장거리의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고 국가대표가 되어 2006년 토리노, 2010년 밴쿠버, 2014 소치까지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입상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2009동계 유니버시아드 팀추월에서 은메달, 2013년 세계선수권 팀추월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이 국제대회에서 거둔 메달의 전부였다.

그에 비해 늦게 운동을 시작한 동생 노진규는 2010 세계주니어선수권 종합우승에 이어 2011 세계선수권 종합우승 등 국제대회에서 눈부신 성적을 거두며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의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월드컵 1,500m에서 6회 연속 우승하는 등 중장거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체력으로 2014 소치올림픽의 금메달 유망주가 되었다. 하지만 불의의 부상과 골육종 수술로 선수 생활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다가 결국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친구 같던 두 남매

두 사람의 성적이 함께 빛난 무대는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이었다. 노진규는 1500m와 계주, 노선영은 매스스타트와 팀추월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이후 두 선수는 같은 대회에 동반 출전하지 못했고, 이제는 노선영도 마지막 경기인 팀추월을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팀추월 월드컵 랭킹은 9위. 지난 소치올림픽에서도 8위에 머물렀던 만큼 메달 획득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홈그라운드이고, 토너먼트이기 때문에 어떤 기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7년 전 진행한 인터뷰에서 노진규는 누나는 어떤 존재냐는 질문에 ‘친구 같고 가장 편한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자 노선영은 “얘는 내가 제일 만만하다니까요!”라고 외쳤다. 두 사람은 남매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서로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 동료였던 것이다.

이제는 만날 수도, 함께 좋아하는 ‘무한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동생과 함께 뛰었던 1500m에서 본인의 올림픽 최고 성적을 얻은 노선영은 이제 팀추월에서 다시 한번 동생을 위해 뛸 것이다.

여자 쇼트트랙대표 심석희.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여자 쇼트트랙대표 심석희.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한체대 후배 심석희와 동갑내기 박승희

심석희와 노진규의 사이도 각별했다. 한체대 선후배인 두 사람은 선수촌 생활 동안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노진규가 갑작스럽게 요절했을 때 가장 슬퍼하던 선수가 바로 심석희였다. 심석희는 그의 49재를 지낼 때까지 매주 아버지와 함께 노진규의 유골이 있는 사찰을 찾았고, 노진규 1주기 때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되도록 많은 분이 오빠를 오래오래 마음에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심석희는 “나의 멘토는 노진규 오빠다. 언제나 의지할 수 있던 존재였다”면서 노진규를 위해 이번 대회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대표 박승희. 스포츠동아DB

여자 스피드스케이팅대표 박승희. 스포츠동아DB


4년 전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냈던 박승희는 노진규와 동갑내기 친구다. 그는 2년 전 노진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친구야. 10살에 만나 지금까지 넌 정말 좋은 친구였어. 함께 한 긴 시간들과 네가 사랑했던 스케이트를 탈 때 너의 모습도 전부 잊지 않을게. 이제 아프지 말고 좋은 곳에서 꼭 행복해. 한없이 착하고 밝았던, 내 기억 속 너로 평생 기억할게. 다음 생애도 우리 꼭 친구로 만나자. 정말 너무 보고 싶다 진규야.”라고 적은 바 있다.

공교롭게도 노선영, 심석희, 박승희 세 사람 모두 강릉 선수촌 801동 1903호를 함께 쓰고 있다. 룸메이트 세 사람은 노진규를 기리며 남은 올림픽 기간 동안에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빙상 칼럼니스트
아이스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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