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①] 슬픔이어도, 가장 아름다운 순간 ‘사랑’에 대해…

입력 2018-04-09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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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차오웨이(왼쪽)와 장만위가 주연을 맡은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 두 사람은 현실의 도덕률 안에서 뜨거워질 수도, 격정적일 수도 없었던 사랑을 하고 안타까운 이별을 맞는다. 사진제공|굿타임엔터테인먼트

■ 영화 ‘화양연화’

낭만 혹은 불륜…불안한 홍콩의 밤
이별을 예비한 여자는 눈물지었고
떠난 남자는 사랑을 가슴에 묻었다


‘별들이 소곤대는/홍콩의 밤거리/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꽃잎같이 다정한 그 사람이면/그 가슴 품에 안겨 가고 싶어요’.

1954년 가수 금사향은 홍콩의 밤을 이렇게 노래(‘홍콩아가씨’)했다. 은방울꽃을 파는 아가씨가 꿈꾸는 사랑을 그린 노래는 금사향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제법 어울리며 ‘향기 나는 항구’, 홍콩의 낭만적인 밤을 떠올리게 한다.

홍콩은 그처럼 이방인들의 눈에 ‘낭만’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이미지를 지녔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무언가 사연을 지니고 있을 분위기를 풍겨내며 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비스듬히 걸친 남자들과 수줍은듯 몸을 감싼 치파오의 여린 몸매를 지닌 여자들이 오가는 밤거리. 오랜 옛날 식민의 아픔을 지운듯, 그저 한갓진 낭만의 화려함만을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도시. 그래서 한때 문화와 예술과 사랑을 꽃피어냈던 근현대적 내음의 공간.

하지만 세기말의 홍콩 사람들은 불안하기만 했다.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 사진제공|굿타임엔터테인먼트


● 수줍은 만남

영국의 홍콩 주권이 종료된 것은 1997년 6월30일이었다. 다음날 영국은 홍콩의 주권과 통치권을 중국에 넘겼다. 중국이 이를 기념하는 의식을 성대히 치렀다. 하지만 의식을 바라보는 홍콩 사람들은 불안했다. 그동안 누려왔던 자본주의의 체제를 향후 50년 동안 보장받으며 자치권을 갖는 조건이었는데도, 결코 그와는 양립할 수 없는 사회주의라는 낯선 체제로부터 지배받는 것 또한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불안감은 우위썬(오우삼)과 쉬커(서극) 등이 펼쳐내는 어두운 뒷골목 사내들의 이야기로도 표현됐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혹시 모를 체제의 변화, 자치권과는 또 다른 의미를 주는 중국의 지배 등 자신들의 처지를 둘러싼 갑작스런 달라짐에 대한 불안감을, 홍콩의 느와르는 사내들의 진한 우정과 격렬하고도 비장한 액션으로 달랬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은 두 남녀를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수줍은 만남은 1962년 시작됐다. 만남은 이듬해 헤어짐이 됐다. 여자가 남자를 떠나가 버린 건 아니었다. 먼저 떠나가 버린 이는 남자였다. 그에게서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여자는 남자의 향취가 남은 방 안에 홀로 남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뜨거움의 기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격정도 없었던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즉 현실의 도덕률 안에서 이들은 뜨거워질 수도, 격정적일 수도 없었다. 뜨거워져서는 안 됐고, 격정적이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었다. 오히려 도덕률을 어긴, 혹은 어겼다고 의심되는, 자신들의 배우자들과는 스스로 다르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만이 자신들의 만남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 사진제공|굿타임엔터테인먼트


● 이별을 예비하다

현실의 도덕률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에 남자는 여자를 위해 스스로 떠남을 택했다. 여자 역시 그를 붙잡아둘 아무런 명분도 갖지 못했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를 떠나기 전 물었다.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같이 가겠소?”

대답하지 못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떠나간 뒤, 역시 대답 듣지 못할 물음을 냈다.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 건가요?”

이미 쓸쓸한 이별을 예비해두었던 이들이었다.

뜨겁고 격정적이지 못했지만, 만남과 헤어짐의 감정은 깊고도 깊었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발설할 수 없는 감정을 남자는 끝내 봉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옛날의 사람들이 산에 올라 나무 아래 구멍을 파고는 자신의 비밀을 속삭인 뒤 진흙으로 봉해 두었던 것처럼.

남자는 여자와 헤어진 이래 3년의 세월이 흐른 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의 벽에 난 구멍에 “영원히 가슴에 묻고” 가야 할 비밀을 봉했다. 진흙의 진득한 밀도 사이로 삐죽 솟아난 몇 가닥의 잡초만이 남자의 비밀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 사진제공|굿타임엔터테인먼트


●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남자는, 또 여자는, 그렇게 한 시절을 떠나보냈다. 서로를 처음 만났던 홍콩의 상하이 이주민 아파트의 좁은 복도에 선 채 과거가 남긴 추억의 회한을 곱씹는 남자와 여자에게 자신들이 지나온 한 시절은 ‘좋았던 옛날’이었을까.

혼란스러웠던 세기말의 주권 반환을 바라보며 불안했던 홍콩.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공기 안에서 왕자웨이 역시 향기 융성했던 ‘좋았던 옛날’의 홍콩을 기억하려 했는지 모른다.

불안이 잠식하는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예측. 하지만 이미 남자와 여자는 쓸쓸한 이별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불안감이야말로 한 시절을 떠나보내는 통과의례가 될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해볼 수 있겠다.

남자와 여자는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거나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는 전제가 달렸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냇킹 콜의 노래 ‘Quizas’(키사스)에 자신들의 마음을 실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그 쓸쓸하지만 깊었던 만남과 이별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지금, 쓸쓸한 가슴을 앓는다 해도, 한때의 지나갔던 시절의 아름다웠던 마음이야말로 남자와 여자의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기를.

“Quizas! Quizas! Quizas!”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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