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①] 외계인과 말이 통할까? 전 우주적 ‘바벨의 저주’

입력 2018-04-23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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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해독하려 애쓴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비논리적이며 비선형의 외계 언어를 통해 그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적 삶에 관한 고민에 휩싸인다.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 영화 ‘컨택트’

시공간을 초월하는 외계인의 언어
그 해석을 두고 갈등과 분쟁 휩싸여
공감과 이해의 고통은 인류의 운명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당초 세상의 언어와 말은 한 가지였다.

거대한 방주에 의지해 대홍수 끝에 살아난 노아의 후손들은 번성했다. 대홍수의 고통을 겪고 난 뒤 이제 자연의 섭리와 신의 명령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욕망이었을까.

이들은 땅 위에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고, 높디높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쌓으려 했다. 이들은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 탑을 건설하여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 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신은 분노했고 인간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언어는 서로 달라지고 말았다. 신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했기 때문이다.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 한 가지였던 말, ‘바벨의 저주’

바벨탑에 관한 창세기의 이야기대로 정말 세상의 언어가 각기 달라짐으로써 인간은 흩어지게 된 것일까. 그 각기 다른 언어를 서로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까. 정말 영화 ‘컨택트’의 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의 말대로 “문명의 초석이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기도 하지만, “모든 분쟁의 첫 무기”도 바로, 언어이고 말일까.

“문명의 초석은 과학”이라고 믿는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는 루이스 뱅크스에게 묻는다.

“외국어에 몰입하면 사고의 방식도 그 언어를 따라 바뀐다.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바꾼다. 혹시 당신도 그들의 언어로 꿈을 꾸고 있는 거요?”

이안 도넬리는 인류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의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인용했다. 언어학사에 중요한 이론을 이룬 이들은 “언어체계(문법)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단순한 복제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가 생각을 형상화한다는 것, 즉 각 개인의 정신활동, 자기가 받은 이상에 대한 분석, 주고받는 정신적인 것들의 종합을 위한 프로그램과 지침”(벤자민 리 워프, ‘위키백과’ 인용)이라고 말했다.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언어가 곧 사고와 의식을 규정하며, 언어가 세상을 이해하는 시선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어떤 언어, 즉 어떻게 언어를 쓸 것이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언어학의 문외한으로서 실례이며 무지함일까.

난데없이 지구로 날아온 외계인들의 ‘표의’로 이뤄진 언어를 해독하기 위해 루이스 뱅크스와 이안 도넬리가 택한 길도 바로 그것이었다. 외계인의 언어는 원 형태의 비선형 구조를 지녔다. 그래서 인간이 쌓아온 논리적 사고체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루이스 뱅크스와 이안 도넬리와 외계인은 대신, 오래 전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해낸 상형문자처럼 서로의 행동을 따라하며 흉내 내는 것에서부터 이해의 과정을 시작한다.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 서로 다른 말…불순함을 거부하는 공감

하지만 이해는 또 다른 오해로 이어지고 만다. 간신히 해독해낸 외계인의 언어를 두고 세상은 또 다른 분쟁과 갈등에 휩싸인다. 말을 둘러싼, 그 의미와 뜻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중심에 둔 인간의 사고체계는 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바벨의 저주’처럼 세상의 갖은 갈등과 분쟁은 해결할 수 없을지 모를 만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언어와 말은 인간이 지닌 탁월한 능력 가운데 하나여서, 인간의 말과 언어로써 숱한 갈등과 분쟁은 해결되어 왔다. 그렇지 않다면 바벨의 저주는 아마도 일찌감치 세상을 공멸의 길로 몰아갔을 것이다.

이처럼 말이 말로써 소용될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발화하는 순간 특정한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은 단지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은 그래서 말을 나누고 전하는 이들 사이에 오가는 특정한 뜻과 의미를 공유하는 과정이 된다.

‘바벨의 저주’가 서로 말이 다른 세상에 각기 지닌 특정의 뜻과 의미를 공유할 수 없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써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 애써왔다. 그래서 문제의 본질 역시 성대와 입과 목소리로써 발화한 말의 특정한 뜻과 의미를 온전히 공유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을 겪느냐 마느냐 하는 데 있으리라.

외계인의 언어는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원 형태로 이뤄져 있다. 그들의 이 같은 언어를 이해하면 인간의 시선에 고정된 논리와 흐름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짓는 것은 의미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처음을 알 수 없으니 끝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처음을 안다 해도 그 덕분에 알 수 있는 끝 역시 함부로 규정할 수 없음이다.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이는 다시 현재의 시선으로써만 미래를 다가오게 할 수 있음을 역설하는 건 아닐까. 바벨의 저주를 끊임없이 거부하려 서로에게 언어와 말로써 다가선 인간의 힘은 위대하다 믿는다. 위대함은 결코 독선적일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가 서로의 언어가 지닌 뜻과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유하지 않으면 위대함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말이 말로써 통하고, 말을 말로써 들으며, 말로써 말을 이루게 하는 과정은 공감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한다. ‘바벨의 저주’ 역시 공감의 능력으로써 단호히 거부되는 것이다. 하여 바벨은 ‘저주’가 아니라 이 같은 공감과 이해의 과정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또 다른 운명에 관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은, 그런 과정 없는 미래와 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려는 모든 행위는 불순하다. 말이 말로써 통하고, 말을 말로써 들으며, 말로써 말을 이루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 불순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리라.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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