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이 성탄절을 함께 보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평화를 갈구하는 인간적 공감은 관객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사진출처|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캡처
전쟁의 참화로 얼룩진 1914년 성탄절
처절한 전투도 멈추게 한 평화의 노래
100년 지난 지금 다시 평화를 외치다
가랑비와 소나기가 번갈아 흩뿌렸다. 늦가을의 스산함보다는 비로 인한 궂은 날씨의 기운이 더 짙어 보이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파리 시민들은 우산을 쓰지 않았다. 개선문으로 통하는 인근 7개 지하철역과 방사형의 도로는 모두 통제됐다. 인도와 차도를 경계 짓는 바리케이드를 방패삼아 1만여 경찰이 삼엄한 경비에 나섰다. 하지만 상점들은 평소처럼 문을 열었다. 11일 일요일 오전(이하 현지시간), 파리 시민들은 그 앞을 여전히 우산 없이 분주히 혹은 천천히 오갔다. 100년 전 그들에게도 이날 같은 한가로움이 있었을까.
●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일상이 혼란에 빠져들며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14년이었다. 그해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이자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임신한 부인 조피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속국 보스니아의 세르비아를 찾았다.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구가 결혼 14주년을 맞은 부부를 향했다. 총탄은 황태자의 머리와 조피의 복부를 관통했다. 오스트리아는 한 달 뒤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의 본질은 복잡했다. 식민지 확대를 꾀하는 제국주의의 충돌, 독립을 꿈꾸는 발칸반도 지역의 범 세르비아와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범 게르만의 대립 등 민족주의 분쟁, 산업혁명 이후 끓어오르기 시작한 혁명의 기운과 이를 잠재우려는 계급간 투쟁이 얽혔다. 그 중심에 독일이 있었다. 아직 연방체인 조국을 북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시키려는 과정에서 ‘철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황제 빌헬름 1세의 지원 아래 오스트리아와 맞섰다.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킨 뒤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이번엔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시대의 문제는 철과 피로써 해결된다”며 영국과 프랑스를 앞지르려는 후발산업국의 위상을 부국강병으로 구축해갔다. 하지만 빌헬름 2세가 등극하면서 그는 자리를 잃었다. 새 황제는 제국주의와 범 게르만의 확장이라는 야망을 버리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발칸 진출을 위해 세르비아 지원을 명분으로 오스트리아를 겨눈 러시아의 전쟁 선언은 좋은 빌미가 됐다. 독일은 러시아와 그 동맹국인 프랑스, 중립국인 벨기에로 진격했다. 독일의 세력 확장을 지켜볼 수 없었던 영국은 물론 독일 잠수함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미국 그리고 근대화의 눈을 떠 중국 대륙 진출을 노리는 일본까지 전쟁에 뛰어들었다.
전 세계 34개국이 참전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잠수함과 탱크, 기관총 등 온갖 ‘최첨단’ 무기가 등장했다. 독가스로 불리는 화학물질이 사람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갈 수 있음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사진출처|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캡처
● 잠시의 평화, 영원할 수 없나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인 1914년 가을, 프랑스의 저항에 독일은 주춤거렸다. 전투는 고착화했다. 병사들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적의 포탄이 파 놓은 구멍을 더 파 들어가기도 했다. 지면은 때로 해수면보다 높지 않아 질퍽했다. 구덩이를 파면 팔수록 물이 솟아났다. 그 위로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방어용이자 경계용으로 썼다. 프랑스군은 잔가지를 묶어 이를 대신하기도 했다. 구덩이는 ‘갈 지(之)’자 형태로 이어졌다. ‘참호’(tench·트렌치)는 그렇게 구축됐다.
각 진영은 몇 십 미터에 불과한 완충지대를 두고 마주 보기도 했다. 완충지대엔 철조망이 설치됐다. 머리를 참호 위로 내밀기라도 하면 저격병의 총탄은 정확히 날아들었다. 병사들은 “돌격! 앞으로!” 명령에 30∼40kg의 군장을 멘 채 참호를 넘어 날아드는 기관총 총탄을 향해 달려 나아갔다. 병사들은 철조망 위로 쓰러졌다. 그렇게 1000만명 가까운 이들이 스러져갔다.
그러나 병사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죽음을 소리로 예감하기도 했다. “흰 곰팡이, 초목이 썩는 냄새, 사람과 동물의 시신이 부패하면서 나는 악취” 가득한 구덩이 속에서 몸을 잔뜩 낮춘 병사들은 “폭발 후 대기 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포탄 뚜껑의 귀신같은 소리, 병사들의 낮고 구슬픈 울음소리, 포격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엄청난 파리 떼들의 윙윙거리는 소리, 쥐들의 새된 비명소리, 숭고한 부조리라고 할 만한 새들의 노랫소리”에 시달렸다.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존 엘리스 지음·정병선 옮김)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에게도 성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솜(Spmme)을 비롯한 프랑스 북서부 지역을 최대의 전장으로 삼았던 병사들에게 1914년 성탄절은 더욱 특별했다. 누군가 성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참호를 넘어 완충지대를 지났다. 병사들은 참호를 빠져나와 완충지대에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Merry Christma(메리 크리스마스)!” “Joyeux Noel(조이유 노엘)!” “Fröhliche Weihnachten(프뢸리헤 바이나흐텐)!”
축구시합을 했고, 소지품 가운데 무언가를 선물하기도 했다. 노래는 전투를 멈추게 했다. 완충지대에 스러진 전사자들의 시신도 찾아 거두도록 배려하게 했다. 순간, “많은 군인들은 자신들의 적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위 책). 오로지 인간들의 선의만이 구덩이를 메워 평화의 비무장지대를 만들어냈다.
“만약에 내가 영화 필름으로 그 장면을 보았다면 맹세컨대 날조된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영국 보병부대의 장교 에드워드 헐즈가 존 엘리스의 글을 빌려 말한 것처럼, 1914년 전장에서 평화는 기적과도 같았다. 적어도 그날 선의의 인간으로서 평범한 이들과 전쟁을 몰고 온 엄혹한 현실은 무관했다.
4년 뒤 11월11일 프랑스 북동지역 콩피에뉴의 숲에 도착한 독일 열차 안에서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1914년 서부전선에서부터 싹을 틔울 수도 있었던 평화의 꽃은 오래도록 피어나지 못했다. 징계를 감당해야 했던 병사들은 제각각 더욱 참혹한 전장으로 배치되거나 자국으로 송환됐다. 그 후로 나치와 파시스트가 다시 폭력으로써 세계 장악을 꿈꿨다. 폭력적 차별과 대립과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극우세력의 위협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
종전 100년 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10일 콩피에뉴를 찾아 서로의 이마를 맞대며 평화를 약속했다, 뒤이어 11일 이들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70여개국 정상들이 파리 개선문 무명용사의 묘 앞에 섰다. 과연 평화는 오는 것인가.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사진제공|위드시네마
■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연합군인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이 적군인 독일군과 함께 보낸 서부전선의 성탄절. 각기 구축한 참호를 방패삼은 참혹한 전투의 와중에 이들은 음악을 계기로 평화를 갈구하는 인간적 공감을 따뜻하게 나눈다. 독일 출신 다이앤 크루거와 벤노 퓨어만, 프랑스의 기욤 까네, 스코틀랜드 출신 게리 루이스 등 실제 각 나라의 배우와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 등 스태프가 참여해 2005년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서 상영했고,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