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사계까지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의 8ight Seasons [공연리뷰]

입력 2022-03-06 19: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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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oung seon

“어떨 때는 연주를 하면서 내 몸에 전율을 느낄 때가 있어요. 너무 좋아서. 그땐 정말 좋은 연주였다고 생각하죠. 반대로 가끔은 내가 내 몸 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떨어져서 내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거죠. 그건 싫어요. 기분 나쁘죠. 내 자신이 흠뻑 음악에 묻어서 나오지를 못했다는 거니까.”

2008년 5월,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김지연은 이런 말을 했다. 인상이 깊어 지금도 기억의 생기가 살아있다.

오랜 만에 김지연의 연주를 보았다. 3월 5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의 연주. ‘8ight Seasons’란 타이틀이 잠시 눈을 멈추게 한다. ‘8개의 계절’에 멋을 부렸다.

4계절이 8계절이 된 이유는 프로그램을 보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와 20세기 탱고의 황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사계’를 묶어 놓았다. 비발디의 사계는 베니스 방언을 사용한 소네트를 모티브로 쓴 곡.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절을 음표로 그렸다.

1부에는 비발디, 2부는 피아졸라인가 싶었는데 보기좋게 빗나갔다. 프로그램도 흥미롭게 짰다. 비발디와 피아졸라의 사계를 계절별로 나누어 구성했다. 1부에서는 봄봄과 여름여름, 2부는 가을가을과 겨울겨울이다.

3개 악장으로 구성된 비발디의 봄을 연주한 뒤 피아졸라의 단악장 봄으로 한 계절을 마무리하는 식이다.

많은 공연장이 그렇지만 예술의전당도 주로 무대 왼쪽(관객 기준으로)의 문을 통해 연주자가 입장한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까지, 굳게 닫힌 문 너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관객으로선 궁금하긴 하지만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날 연주회에서는 꽤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아직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나오기 전, 닫힌 문 너머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다.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유독 컸다. 콘서트홀쯤 되는 대공연장 연주를 앞두고는 어지간한 거장들도 잔뜩 긴장해 예민해지기 일쑤인데, 이날의 연주자들은 여유가 넘쳐보였다.

“우리 재밌게 한번 연주해 보자고”라든지,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해 볼까”라는 에너지가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kim young seon


드디어 김지연 등장. 어깨를 훤히 드러낸 붉은 드레스를 입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김지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클래시칸 앙상블의 악장 김덕우와 악수를 나눈다. 김덕우 역시 대단한 연주자. 기회가 되면 그의 독주도 꼭 감상해 보시길.

이날의 연주는 지휘자 없이 김지연과 클래시칸 앙상블의 협연으로 진행됐다. 지휘자의 포디엄 위치에 자리를 잡은 김지연은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런히 단원들과 눈과 미소로 소통하며 연주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누구와 연주하든 라이브 무대에서 김지연이 이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연주 다음 가는 대단한 볼거리라는 것을(음반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김지연은 비발디와 피아졸라의 사계를 모두 암보로 연주했다. 악센트가 강했고 리듬이 싱싱하게 몸을 이리저리 뒤채는 연주.

비발디와 피아졸라의 사계는 과연 같은 계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구별됐다. 피아졸라의 사계에 비발디의 유명한 주제를 삽입한 것도 흥미로웠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는 네 개의 탱고곡을 모은 작품이다. 원래 개별적으로 작곡한 곡들이지만 피아졸라는 종종 이들을 묶어 연주하곤 했다.

이 원곡을 러시아 작곡가 레오니드 데샤트니코프가 독주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개작했다(비발디의 사계와 같은 구성). 각 악장에 비발디의 사계에서 따온 악상을 집어넣은 것이 바로 데샤트니코프다. 흥미로운 점은 비발디의 악상을 반대 계절에 삽입했다는 것인데, 이는 남반구(아르헨티나)와 북반구(이탈리아)의 계절 차이를 고려한 결과라고 한다.

ⓒkim young seon


2부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푸른색 드레스로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김지연은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가을, 겨울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들었지만 김지연의 ‘소리’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의 소리를 꿰뚫는 키워드는 누가 뭐라 해도 ‘우아함’. 예전의 소리가 ‘우아한 칼날’이었다면, 이날 연주에서 들려준 소리는 한겨울 핫팩을 쥔 듯 따뜻해 긴장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연주는 관객의 눈과 귀를 집중하게 만들지만, 더 이상 주먹을 꼭 쥐게 만들지는 않는다.

김지연의 ‘사계’는 종종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사계’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특히 피아졸라가 그랬는데, 복잡한 마음과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도 한순간에 사라지면서 ‘고향의 풍광’이 떠올랐다.

김지연의 이날 공연을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까지는(실은 아쉬워해야 할 만큼 좋은 연주였지만) 없을 듯하다. 아직 두 번의 연주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8일에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트리오 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있고, 15일에는 피아니스트 조재혁과의 듀오 리사이틀이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다. 협주곡, 실내악, 리사이틀까지 ‘김지연 모듬’이다.

그나저나 정작 김지연은 이날 연주가 마음에 들었을까.

앙코르곡 ‘예스터데이’를 연주하는 김지연의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김지연이 연주하는 동안 그를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김지연’의 모습은, 적어도 관객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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