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무대에 오른 박혜나.  이날은 박혜나의 팬클럽 ‘나나핑’이 공식 출범한 날이기도 했다.  사진제공 | 샘컴퍼니

앙코르 무대에 오른 박혜나. 이날은 박혜나의 팬클럽 ‘나나핑’이 공식 출범한 날이기도 했다. 사진제공 | 샘컴퍼니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열린 박혜나의 첫 단독 콘서트
뮤지컬 넘버로 엮은 네 개의 감정, ‘나나랜드’
데뷔 19년 만에 자신의 이름으로 선 무대
공연 시작 10분 전. 관객의 숨소리가 하나둘 잦아들기 시작했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설렘과 기대감이다. 뮤지컬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무대. 블랙홀 같은 무대에 빛이 비치고, ‘위키드’의 간판넘버 ‘디파잉 그래비티’가 터져 나오는 순간, 상상했던 꿈은 박혜나와 함께 스윽 걸어들어왔다.

11일 일요일 오후,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열린 ‘박혜나의 나나랜드: ROAD TO NANALAND’ 이틀째 공연. 데뷔 19년 만의 첫 단독 콘서트였다. 오랫동안 ‘엘파박’, ‘박에피’ 등 극 중 캐릭터로 불렸던 그는 이 무대에서 오직 자신의 이름 석 자로만 섰다. “꿈같다. 둘째 날이 되면 실감이 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소감처럼, 이날의 공연은 무대와 현실 사이 어디쯤을 부유하는 감정의 대기 속에 있었다.

공연은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뉘었다. 섹션마다 각각의 주제에 따라 박혜나가 출연했던 뮤지컬 작품의 넘버들이 배치됐다. 첫 번째는 ‘설레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스트로베리 봉봉’, ‘레드북’의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 이어졌다. 말쑥한 블랙 수트를 입고 나온 박혜나는 ‘괴물 성량’답게 코러스 세 사람의 음량을 압도하며 관객을 뮤지컬 명장면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기타 두 명, 베이스 한 명, 드럼, 건반 두 명으로 구성된 밴드는 박혜나를 위한 섬세하면서도 육중한 사운드의 틀을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이 박혜나를 ‘고음 괴물’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 밑에 숨어 있는 중음이야말로 진짜 박혜나의 소리라고 믿어왔다. 오랫동안 그의 무대를 봐온 끝에 다다른 단어는 이것이다. 크런치.
초콜릿을 오도독 깨물 때의 느낌이랄까. 혀 위에서는 달콤하지만, 끝은 쌉싸름하다. 그리고 그 사이엔 잘 설명되지 않는 건조함이 놓여있다. 차가운 종이를 씹는 것 같기도 하다. 부드러움과 거침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복합적인 질감. 자극적이지 않아서 더 깊고, 오래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 박혜나만의 확고한 소리다.

두 번째 섹션 ‘사랑’에서는 ‘식스 더 뮤지컬’, ‘데스노트’, ‘프랑켄슈타인’의 넘버들이 이어졌다. 자신과 ‘1’도 닮지 않은 캐릭터라는 ‘프랑켄슈타인’의 악녀 에바의 ‘남자의 세계’는 밴드와 함께 무대를 완벽하게 휘감았다. 속물적이고 포악한 데다 남성지배성향까지 갖고 있는 에바를 박혜나가 맡았다는 소식은 당시 팬들에게 꽤 충격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섹션은 ‘혼란’. 흰색 수트를 입고 다시 등장한 박혜나는 ‘잃어버린 얼굴 1895’와 ‘레베카’를 불렀다. ‘레베카’는 본인이 출연하지 않은 작품의 넘버였기에 더욱 신선했다. 팬들에게는 ‘희귀템’으로 박제되었을 것이다.

이날 각별히 좋았던 점은 박혜나의 친절한 넘버 해설이었다. 단순히 곡의 줄거리를 늘어놓는 식이 아니라, “이건 다들 아시죠?” 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던지는 토크가 재미있었다. 노래하는 박혜나와 말하는 박혜나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섹션은 ‘희망’. ‘이프덴’의 ‘올웨이즈 스타팅 오버’, ‘모래시계’의 ‘모래시계’, ‘더 데빌’의 ‘피와 살’이 이어졌고, 공연은 끝을 향해 치달았다.
공식 팬클럽 ‘나나핑’의 출범도 이날 공식 선포됐다. 자신의 이름에서 가져온 ‘나나랜드’와 ‘희망(Hoping)’의 합성어라고 했다. 박혜나는 “제 희망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짧지만 따뜻한 인사로 그 이름을 관객에게 건넸다.

마지막 곡은 ‘겨울왕국2’의 ‘인투 디 언노운’과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로 장식됐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팬들은 자신들의 스타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박혜나는 앙코르 무대에 옅은 민트색 드레스를 입고 올라왔다. 팬들의 폰에 불이 들어오자, 공연장은 순식간에 별빛으로 가득 찼다.

좋은 배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나름 오랜 시간 동안 이들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은 좋은 배우는 대부분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 평범하고 밋밋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대학로에서 들인 술값은 적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박혜나야말로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연이 끝났다. 객석에서 손바닥이 뜨끈해지도록 손뼉을 치며 나 역시 ‘나나핑’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날의 ‘나나랜드’는 공연의 타이틀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머물렀던 진심의 좌표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아주 기쁘게 입국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