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선택뒤의끝없는비극’다룬아카데미상후보작개봉

입력 2008-02-19 09:34:17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국내에서 21일 개봉하는 ‘어톤먼트’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는 ‘주노’ ‘마이클 클레이튼’ ‘데어 윌 비 블러드’와 함께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다.제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을 배경으로 한 ‘어톤먼트’는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았다. 1980년 미국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노인’은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영화다. ‘어톤먼트’가 관객의 감정을 북받치게 만드는 고전적 멜로인 데 비해 ‘노인’은 뼛속이 시릴 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돈과 폭력의 드라마다.그러나 이언 매큐언(‘어톤먼트’)과 코맥 매카시(‘노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두 영화는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바꾸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부르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들의 인생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로 꼬이기 시작한다.》■ ‘어톤먼트’누명 쓴 연인 전쟁터로비극적 영상 관객 울려1935년 영국, 부잣집 딸 세실리아(키라 나이틀리)와 가정부의 아들 로비(제임스 매커보이)는 오래전부터 사랑하는 사이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서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어느 날 세실리아의 동생 브라이오니(시어셔 로넌)는 서재에서 세실리아와 로비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날 밤 브라이오니는 로비에게 범죄의 누명을 씌운다. 로비는 감옥으로, 다시 전쟁터로 끌려간다. 사랑을 확인한 그날 헤어지게 된 연인은 서로를 애타게 기다린다. 오랜 세월 키워 온 사랑을 산산조각내고 등장인물들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은 13세 소녀 브라이오니가 내뱉은 말 한마디였다. 브라이오니는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였고, 어른들의 세계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녀의 오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 감정은 더 복잡한 것이었다.‘오만과 편견’의 감독 조 라이트와 제작진이 다시 모여 만든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낭만적인 영국의 전원 풍경은 전작에서 보여 줬으니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는 전쟁의 폐허도 ‘비장미’가 느껴지도록 만들어 냈다. ‘됭케르크 철수’(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펼친 철수작전)를 앞두고 군인들과 전쟁의 잔해를 5분 30초간 롱테이크로 찍은 것은 명장면으로 손꼽힌다.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은 “영화 ‘타이타닉’ 이후 가장 가슴 아픈 사랑”이라는 뉴욕포스트의 표현처럼, 너무 짧아서 안타깝지만 그래서 더 짜릿했다. 세실리아가 로비 앞에서 분수대에 들어갔다가 흠뻑 젖은 속옷 차림으로 나오는 장면부터 고조되던 성적 긴장감은 서재의 러브신에서 터져 버린다. 오랜 세월 농축됐다가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두 연인의 감정이 표현된 이 순간은 입술이 바싹 마를 정도다. 에피소드의 구성도 돋보인다. 브라이오니의 오해를 산 장면을 브라이오니의 시점으로 보여 주고 다음에는 두 연인의 시점으로 보여 준다. 후반부에 작가가 된 브라이오니가 잘못을 뉘우치며 ‘어톤먼트(참회)’라는 저서를 두고 인터뷰할 때도 관객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며 끝까지 집중하도록 만든다.13세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로넌의 파란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실제 주인공은 브라이오니인 듯하다. 이 영화는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복잡다단한 감정으로 짜인 그물에 걸려, 결국은 파국을 맞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우아한 비극’이다. 15세 이상.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세남자 피 튀기는 살인냉혹한 시선으로 추적1980년 미국 텍사스 주, 카우보이 모스(조시 브롤린)는 사막 한가운데서 총격전이 벌어진 듯, 시체가 뒹구는 현장에서 물을 달라고 호소하는 남자와 24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을 발견한다. 죽어가는 남자를 버려둔 채 돈 가방을 챙겨 집에 온 모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음 날 새벽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게 실수였다. 이후 그는 살인청부업자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에게 쫓기고 지역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은 그들을 찾아 나선다.뜻밖의 행운이 순식간에 불운이 됐다. ‘왜 하필 그 시간에 갔을까’ 하는 것도 잠시, 관객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긴장이 몰려온다. 긴장을 고조시키는 이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바르뎀이다. 우스꽝스러운 단발머리의 그는 소 도축용 총을 들고 다니며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다. 저승사자나 악마 같다. “삶에 미련을 버려”라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소름이 끼친다.영화는 “요즘 범죄는 딱히 동기도 없다”는 보안관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후반부에 다른 보안관은 끔찍한 범죄에 대해 “웃지 않으면 별수 있나. 돈이고 마약이면 다들 눈에 뵈는 게 없다”고 말한다. 하긴, 시거는 살인을 동전 던지기로 결정할 정도다. 영화의 배경이 황량한 사막이자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경 지대인 점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린다.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첫 구절을 인용한 제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노인’이 뜻하는 윤리나 도덕이 없고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이 영화는 지난해 ‘미국 최고의 영화’로 각광받았다. 타임지 올해의 영화 1위, 미국 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영화 1위 등을 기록했으며 아카데미상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파고’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조엘과 에단 코언 형제 감독은 이 영화가 “우리 작품 중 가장 과격하며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보통 놈’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모스는 비정상적인 환경에 처한 보통 사람이다.세 남자는 계속 서로 쫓고 쫓기지만 같은 화면에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다. 최후 대결도 없다. 스타일 넘치는 편집도 없고, 엔딩 크레디트 전까지 음악도 없다. 발소리와 총소리, 돈 가방에 있는 위치 추적기의 삑삑 소리, 전화벨 소리 등으로만 관객을 몰아붙인다. 대사는 간결하며 시선은 건조하고 냉정하다. 코언 형제는 스릴러의 관습을 거부하는 걸작 스릴러를 만들었다. 청소년 관람불가.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어톤먼트’의 원작 소설 ‘속죄’▼촘촘한 심리 묘사 탁월영화 ‘어톤먼트’의 원작 ‘속죄(Atonement)’는 심리 묘사가 탁월한 소설이다. 인터넷 서점 독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모조리 그물망 안에 짜 넣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세밀하게 묘사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적 상태를 사실에 근접하게 글로써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이 지점이 영화와 크게 차이 나는 부분이다. 영화는 화면에 옮기기 어려운 심리묘사 대신 소설의 서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묘사가 꼼꼼하긴 하지만 스토리 라인이 뚜렷해서 영화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도 원작을 크게 변형하지 않아 만족했다는 후문이다. 다만 소설 후반부에서 작가가 된 브라이오니가 가족 파티가 끝난 뒤 혼자 남아 ‘속죄’를 읽는 독자들에게 하는 독백은 영화에서 변형됐다. 지극히 소설적인 형식인 이 장면은 영화에서는 브라이오니의 인터뷰로 바뀌었다.작가가 소설에서 로비가 겪는 전쟁의 참화를 치밀하고 탁월한 묘사로 옮긴 것을, 영화는 스펙터클로 살려낸 것도 대비할 만하다.▼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영화만큼 오싹한 문체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의 원작은 코맥 매카시의 같은 제목의 소설이다. 영화는 원작을 거의 변형하지 않고 사건의 전개뿐 아니라 사소한 대사도 그대로 따랐다. 감독이 소설을 경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 정도다. 소설에서 자세하게 묘사한 살해 장면을 영화에서는 생략한 부분이 있지만, 소설이 영화화될 때 디테일이 불가피하게 생략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만하다.소설은 무엇보다 문체가 탁월하다. 읽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은 ‘불길한 전조에 물든, 살을 발라 낸 듯한 냉정한 문체’(보스턴글로브) 덕분이다. ‘하드보일드’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소설의 분위기를, 영화는 최대한 영상으로 옮기고자 애쓴다.영화가 따라잡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소설은 보안관을 화자로 하는 1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교차해 전개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비정하고 냉혹한 단문의 연속이지만, 1인칭 시점은 비교적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부패’와 ‘희망’을 대조시키는 이 형식은 영화에서는 살리기가 쉽지 않다. 영화에서는 보안관의 시점을 보안관의 내레이션으로 대체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