Ȳ
“내삶의고별방송?인생은재미있는드라마였습니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예술인마을의 ‘카메라타’에 들어섰다. 거대한, 회색빛 공간은 클래식음악과 커피향으로 가득했다. ‘황인용 선생을 뵈러 왔다’고 하니 직원이 한 쪽 구석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황인용(68)씨는 안경 너머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치 세월이 붙들어 매어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들어보이지도, 덜 들어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은 아직도 덥습니까?”
황 씨는 날씨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불과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살면서도, 그는 마치 만 리쯤 떨어져 사는 사람처럼 말했다. 헤이리로 들어온 지 4년. ‘만 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세상과의 거리감일 터였다. 마이크를 떠난 그는 이제 자연인이자 예술인이다.
- 고향이 파주시죠? 이른바 귀향을 하신 것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군요, 흐흐. 고의성은 없지만.”
-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면서 은퇴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황 선생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자신의 직업이 취미와 연결된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일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원하는 것을 얻겠지만 그래도 역시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는 건 좋은 거죠. 저는 본래 하루 30분에서 1시간 정도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 있어야 견디는 인간이었어요. 음악을 듣든, 친구들과 담론을 벌이든, 술을 마시든.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쏟다보면 거기서 뭔가 세계가 생기게 됩니다. 제게는 음악과 오디오였지요. 소리가 좋아서 쫓아다니다보니 노후에 하나의 동반자, 인생의 동반자로 발전됐다고나 할까요.”
황 씨는 오디오 마니아로 유명하다. 고전음악감상실 카메라타의 진짜 주인은 그런 점에서 황 씨가 아닌 오디오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카메라타의 전면 벽은 거대한 스피커 두개로 채워져 있다. 1930년대 무성영화시대에 미국 극장에서 사용하던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빈티지 제품이다.
- 오디오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신 겁니까?
“70년대까지만 해도 스피커 두 개 달린 전축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했죠. 74년인가? 대한민국 아나운서상을 탔어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시상식을 했죠. 아내와 같이 가서 상금 20만원을 받았습니다. 집에 오다가 그 돈을 가지고 금성사에서 나온 전축(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을 샀지요. 한쪽은 스피커만 있고, 다른 한쪽은 스피커 밑에 튜너와 앰프가 달린 놈. 그게 제 개인 오디오의 시초입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황 씨는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됐다. 프리랜서를 선언한 첫 달 수입이 200만원. 아나운서 한 달 월급이 50만원이 채 안 되었으니 무려 4배 이상을 번 것이다. 첫 수입에서 절반을 떼어 집에 가져다주고, 남은 100만원에 돈을 보태 세운상가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탄노이 턴테이블과 쿼드 앰프를 샀다. 오디오 인생의 시작이었다.
- 아나운서 월급이 그렇게 짰습니까?
“말도 못하죠. TBC가 삼성계열이잖아요? 그런데 삼성그룹, 예를 들면 삼성종합상사같은 곳하고 비교할 수가 없었죠. 아나운서는 보너스도 없었어요. 중계방송을 죽어라고 해도 특근수당 400원인가 받았죠.”
사람들이 ‘황인용’ ‘황인용’하던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돈이 없었다. 70년대 후반 저명한 모 일간지 주필이 황 씨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황 씨 집에 전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화가 난 주필이 동양방송 고위층에 전화를 걸어 “당신네 대표 아나운서가 아직 전화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레코드라는 걸 거의 사 보지 못했어요. 내가 40년생이니까 80년이면 마흔. 마흔 되도록 그랬어요. 아마 그 이후 행적을 보면, 30대 때의 빈궁함으로 맺힌 한풀이가 아닌가 싶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마음껏 가졌느냐 … 하면 그건 아니고. 지금 카메라타의 음향 시스템도 불완전해요. 소리 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전원장치니 하는 것들이 오리지널이 아니거든. 그런 걸 다 갖추고 싶죠.”
- 돈도 많이 드셨죠?
“뭐 일부 처분하기도 하고, 돈 더 보태서 바꾸기도 하고 … 1억은 넘겠죠, 아마?”
80년대 라디오세대에게 황씨는 ‘영원한 영팝스’이다. 오후 8시, 척 맨지오니의 ‘Give it all you got’ 트럼펫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황씨의 오프닝 멘트가 깔리고, 곧 이어 첫 곡이 흘러나오면 너나할 것 없이 우리들은 워크맨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덮어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너덜너덜한 공테이프는 당시 10대들의 자랑스러운 훈장이었다.
- 영팝스를 듣던 세대들은 황선생을 팝전문가로 여기고 있었는데, 언제 클래식으로 ‘전향’을 하신 겁니까?
“방송에서 하도 팝을 듣다 보니까 반발심리가 생겼다랄까요, 하하하! 저는 사실 클래식에 대한 ‘펀더멘탈’이 매우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고전음악에 대한 본질적인 호기심이 아주 강했어요. 모르니까. ‘아, 이게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예술세계구나’하고 느꼈죠. 그렇다고 해서 팝을 싫어하거나 홀대하지 않습니다. 팝 중에도 예술차원에서 훌륭한 곡들이 부지기수죠. 다만 클래식은 팝과는 전혀 다른 음악언어라고 할 수 있겠죠. 아마, 허영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거예요. 클래식을 들으면 뭔가 … 하하하!”
황 씨는 스스로 지극히 가난했지만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움직이는, 그것도 크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여선생님의 풍금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중학교 때 새로 부임한 음악선생이 “얘들아, 이게 성악이란다”며 직접 불러준 가곡 ‘희망의 나라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평생 모은 LP판은 1만4000여 장에 이른다. 이 중에는 ‘김경원 박사 컬렉션’ ‘홍석현 회장 컬렉션’ 등 기증받은 것들도 있다.
한때 방송가에서 그는 ‘황육백’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누군가가 “황인용은 한 달에 600만원을 번다”고 말하고 다닌 것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90년대 얘기일 겁니다. 그땐 정말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아침에는 강부자 씨와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2시간, 밤에는 ‘영팝스’ 2시간. TV도 했지 … CF에도 가끔 등장하지 … 실제로 어느 해인가는 전체 연예인 중 세금 낸 순위가 6등인 적도 있었죠. 하여간 그 당시는 동료 아나운서들한테 ‘야, 황인용이가 큰 부자되겠구나’하는 이미지를 주지 않으려야 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큰 부자’가 되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동료들보다 많이 번 것은 사실이지만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매니저를 두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된다. 그저 많이 뛰고 적게 받았다. 박리다매였지만 실속이 별로 없었다.
-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또한 간판 프로그램이었죠. 기억나는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으십니까?
“‘황인용’이란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게 그 프로그램 덕이었죠.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는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호텔에 가면 도어에서 일하시는 분, 음식점 가면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 이런 분들한테 절대적으로 인기가 있었죠. 그런데 이런 분들한테 인기 있으면 살기가 굉장히 편합니다, 하하하! 그리고 그 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푸하하!”
황 씨는 1980년 신군부 정권의 언론통폐합이 실시되던 당시 TBC 동양방송 소속의 아나운서였다. 그 해 11월 30일 밤12시. 그는 동양방송 최후의 방송을 한 아나운서로 기억된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마지막으로 방송하며 울먹이던 그의 목소리는 당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셨다.
“남은 5분이 … 남은 5분이 너무 야속합니다. 10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5분이 10분이 될 수는 없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오래오래 동양방송의 기억을 소중히 묻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중략) 아, 이제 동양방송은 3분입니다.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번호를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 육백 삼십 … 구 킬로헬츠 … ”
황 씨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밤 11시부터 12시까지 1시간 동안 진행했다. 본래 새벽 1시까지지만 이날은 12시를 기점으로 동양방송의 전파 송출을 중단해야했기 때문이었다.
“TV는 11시 30분쯤 끝났죠. 동양방송의 마지막 방송을 보기 위해 동료들과 PD들이 모두 스튜디오로 몰려왔습니다. 안에서는 나 혼자 방송을 하고, 유리창 밖에서는 수많은 직원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죠.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날을 얘기하면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상처를 깁고 치유하는 유일한 신의 치료제이다.
준비해 온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왔습니다. 지금 눈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고, 전 국민이 황선생의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삶의 끝에서, 마지막 방송을 하신다면 뭐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인생은 뭐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지만 … 또 그렇다고 그렇게 쓴 것만도 아닙니다. 인생은 재미있는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살아볼 만 합니다 … 이 정도가 아닐까요?”
파주=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