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막장 드라마. 요즘 TV 프로그램의 트렌드를 이끄는 장르들이다. 하지만 이들 외에 한번 방송하면 시청률 10%는 거뜬히 올리며 고정 팬을 가진 또 다른 장르가 있다.
바로 다큐멘터리다. 이제는 다큐도 ‘명품 시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봤던 공룡이 등장하고,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스커버리 등 해외 유명 전문 채널에서나 보던 북극의 모습도 눈앞에 펼쳐진다.
방송 전에 해외에 수출되는 가하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둔 작품도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다큐를 한국 방송의 비주류 장르라고 하겠는가.
○ 다큐멘터리, 왜 인기인가
우선 고화질TV의 보급과 매체 다양화에 따른 시청자 눈높이 상승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EBS 기획다큐팀의 한 PD는 “위성·케이블채널 등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시청자 기대치가 동반 상승했고, 고화질TV 같은 영상 기술 발달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2∼3년 사이 제작비가 늘어난 것도 완성도를 높인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2007년 방송한 KBS ‘차마고도’는 6부작 제작비가 12억원. 하지만 2008년 방송한 EBS ‘한반도의 공룡’은 3부작 16억 원, MBC ‘북극의 눈물’은 3부작 20억 원의 제작비가 각각 들었다.
물론 MBC 시사교양국 윤미현 책임프로듀서처럼 “고비용 다큐멘터리에 시청자의 눈높이가 고정되면 일반 다큐멘터리가 외면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제작비 증가는 색다른 볼거리를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함께 낳는다. 국내 최초 360도 회전 항공촬영장비 시네플렉스를 도입하고 헬기에 망원렌즈를 부착해 2km 근접 촬영을 진행한 ‘북극의 눈물’이나 ‘쥐라기 공원’에 버금가는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을 선보인 ‘한반도의 공룡’이 이런 경우다.
아예 처음부터 해외 판매를 목표로 제작하는 작품도 등장한다. KBS 1TV ‘누들로드’ 제작한 김무관 책임프로듀서는 “사전조사를 통해 유럽시장을 겨냥해 영국 BBC에서 활동하는 요리사 켄 홈을 기용했다”고 밝혔다. 이런 의도는 적중해 ‘누들로드’는 국내 방송 전에 유럽과 아시아 8개국에 먼저 판매됐다.
○ 다큐 촬영은 생사를 건 싸움
하지만 스케일이 커진 것에 비례해 제작진이 감수하는 위험도 크다. ‘북극의 눈물’ 을 제작하며 1년 간 극지에 머문 송갑영 촬영감독은 빙산 촬영을 위해 헬기에서 내리던 중 빙벽에서 미끄러져 10m 아래 북극해로 빠지는 아찔한 상황을 맞았다.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였지만 그는 사고 뒤 다시 헬기에 몸을 밧줄로 묶고 항공 촬영에 나섰다.
그런가 하면 드라마 ‘이산’과 ‘대장금’으로 사극 팬에게 친숙한 김영철 촬영감독도 이번 ‘북극의 눈물’ 제작에 참가해 순록의 이동을 찍기 위해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디며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도보 행진을 하기도 했다.
현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참을 인’은 최고의 덕목이다. ‘한반도의 공룡’ 제작팀이었던 한상호 PD는 백악기 한반도 지형 촬영차 뉴질랜드 로케를 갔다가 눈이 쏟아지자 필요한 영상을 위해 해발 1800m의 겨울 산에서 일주일간 버티기도 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도 자동차로 꼬박 4일을 달려야 하는 고비사막 힐멘자브에서 ‘공룡의 땅’을 촬영했던 이동희 PD는 40일간 생리현상과 싸워야 했다.
물 한 방울 없는 사막 가운데서 안 씻고 안 마시며 버텼다. 여자인 그녀에게 최대 난관은 ‘화장실’.
이동희 PD는 “사방이 평원인 그곳에서 ‘볼 일’을 보려면 우산으로 가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하필 가져간 우산이 노란색이라 더 눈에 띄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달리 휴먼 다큐 연출자들은 출연자의 가슴 속 이야기를 영상에 담기위한 서로의 신뢰를 쌓으려는 ‘애정 투자’에 전력한다.
2007년 MBC 휴먼다큐 시리즈 ‘사랑’에서 ‘엄지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 편을 연출한 유해진 PD는 그때 맺은 남다른 신뢰 덕분에 지난해 ‘MBC 스페셜’을 통해 속편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가 1, 2편을 제작하는데 보낸 시간은 3년이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