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 치료제로 에이즈 감염”… 환자들 투병 20년 만에 대법서 사실상 승소

입력 2011-11-09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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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억지로 밥을 먹는다… 약 먹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혈우병 치료제 주사를 맞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사실을 처음 단독보도한 동아일보 2002년 9월 13일자 A1면 기사.

“딸그락 딸그락, 탁.”

지난달 19일 낮 12시 30분. 충남에 사는 김민호(가명·49) 씨는 휠체어에 앉은 채 냉장고를 열고 반찬통을 식탁으로 옮겼다. 지난해부터 손 떨림 증세가 나타나 그릇을 옮기는 것도 어렵다. 식탁 위의 전기밥솥에서 밥을 덜어낸 뒤 수저로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제가 왜 밥을 먹는지 알아요? 약을 먹기 위해서예요. 약 때문에 구역질이 나지만 죽지 않으려면 약을 복용해야 하거든요.”

김 씨는 혈우병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을 동시에 앓고 있는 환자다. 하루 6차례 혈우병과 에이즈 약을 먹어야 한다. 관절 등 몸속에서 출혈이 있다는 느낌이 오면 혈액응고제 주사를 자신의 팔에 놓는다. 그는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복용해 왔다. 그러나 최근 1년 사이 몸무게가 40kg대 후반으로 10kg 정도 줄었다. 혼자 사는 그는 손 떨림 현상이 심해지고 체력이 크게 떨어지면서 전기 청소기조차 들기 힘들다. 점점 강해지는 에이즈 병마와의 싸움이 버겁기만 하다. 벌써 20년째다.

혈우병 환자인 김민호(가명) 씨는 1991년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염된 혈우병 치료제를 맞고 에이즈에 감염됐다. 조그만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김 씨. 김규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youtae@donga.com

혈우병 환자인 김 씨가 에이즈 감염자가 된 것은 1991년으로 추정된다. 피가 잘 멎지 않는 혈우병 환자는 출혈 시 혈액응고제를 맞는다. 김 씨는 이 무렵 녹십자에서 제조된 주사제 ‘훽나인’을 맞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993년 검사에서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 판정을 받았다. 1991∼93년 김 씨를 포함해 같은 이유로 HIV 보균자가 된 사람은 모두 20명이다. 이 중 생존자 18명 가운데 16명과 가족 53명 등 69명은 2003년 2월 ‘에이즈 감염이 치료제 때문’이라며 녹십자홀딩스를 대상으로 3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김 씨 등은 1심 원고 일부 승소, 2심에서는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9월 29일 대법원 3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원고 패소 판결을 한 항소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치료제를 투여 받기 전에는 감염을 의심할 만한 증상이 없었는데 투여 후 감염이 확인됐다면 치료제의 결함 또는 제조사의 과실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혈액제제가 에이즈 병원균에 오염됐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 “재판에 이겼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남은 건 약봉지뿐” ▼

“이 고통 언제나 끝날지…” 혈우병과 에이즈를 동시에 앓고 있는 환자는 하루에 6차례 약을 먹어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약을 먹고,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는다. 김민호(가명) 씨가 자신이 복용하는 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규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youtae@donga.com

“재판 결과는 들었어요. 하지만 이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치료제라는 주사 맞고 에이즈 걸린 우리만 억울한 거지요.” 김 씨는 그동안 제약사 측으로부터 사과의 말 한마디 제대로 듣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감염된 지 20년간 남은 것은 약봉지뿐”이라며 책상 위에 자신이 복용하는 약을 잔뜩 꺼내 놨다. 작은 책상 한가득이다. 이뿐 아니라 그의 침실 옷장은 옷 대신 시간대별로 먹어야 하는 약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손이 떨리고 살이 빠지면 (사는 게)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재판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죠.”

○ 파괴된 삶


김 씨의 인생은 에이즈 감염 뒤 180도 바뀌었다. 1993년 감염 사실을 알고 그는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에이즈에 걸리면 금방 사망한다고 알려졌었다. 당시 김 씨는 가족들의 충격을 우려해 알리지 않았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집사람에게 말하지 못했어요. 3년 뒤인 1996년쯤 말했을 겁니다. 집사람도 매우 걱정했고요. 결국 1999년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혼한 뒤 친척들과는 물론이고 자녀들과도 멀어졌다. 그는 “엄마하고 사는 아이들과도 왕래가 뜸해요. 아는 분을 통해서 잘 자라고 있다고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헤어진 후 혼자 남게 된 김 씨는 자신이 사망한 이후에 부인과 자녀에게 재산을 만들어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해 보석 세공을 배웠다. 또 정밀한 보석 세공일을 하면서 자신이 에이즈 환자,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 씨가 차린 ‘금은방’도 지방 불경기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가게를 연 지 3년여 만에 문을 닫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아 물건을 파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는 “가게 문을 닫은 뒤로도 한동안 취미로 해왔지만 이제는 손이 떨려서 그나마도 못한다”고 말했다. 작업실로 쓰이는 작은 방의 세공 기계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제 김 씨는 정신지체장애인 쉼터에 나가 장애우들을 만나는 것과 집에 와서 애완견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다. 김 씨는 “제게 무슨 계획이 있겠어요. 그냥 지낼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 외로움의 골방에 갇힌 그들


“어머니와 친척 몇 사람만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알아요. 에이즈 환자가 주변에 있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경북에 사는 이지호(가명·42)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외출 안합니다. 누가 보는 것 같아요. 하루 종일 방에서 인터넷 서핑하는 것이 전부예요”라고 말했다. 이 씨는 20대 중반에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됐다.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직업이 없는 그는 이제 가족들과도 거리를 둔다. “조카들이 와서 같이 식사할 때 그냥 ‘배부르다’ ‘먼저 먹었다’고 합니다. (식사로 옮지 않지만) 혹시나 해서 그럽니다. 나중에 감염 사실을 알고 나서 두려워할 수 있으니까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항상 조심합니다.”

이 씨의 어머니는 전화에서 “고쳐준다고 놔준 주사를 맞고 10년이 넘도록 집 안에 있어요. 우리 아들 장가도 못 가고 불쌍해서 어떡해”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 취업 어려워 정부 보조금으로 생계


경북에서 소일거리로 농사를 짓는 박철희(가명·56) 씨는 “혈우병 하나만으로도 취업이 쉽지 않은데, HIV 보균자라면 사실상 취직은 불가능하다”며 “재정적 지원이 없다면 살아가기 막막하다”고 말했다.

연간 수천만 원이 드는 에이즈 혈우병 치료제 피해자들의 치료비와 약값은 정부가 제공한다. 하지만 생계비는 다르다. 일부 여유가 있는 피해자를 제외하면 어렵게 살고 있거나 기초생활수급자로 보조금을 받아 살고 있다. 취재에 응한 에이즈 혈우병 치료제 피해자 3인 모두 기초생활수급대상자다.

재판에서 이겨 배상금을 받아도 걱정이다. 박 씨는 “배상금이 (기초생활수급대상) 기준 이상으로 나오면 자격이 없어질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배상금을 받는 이유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소송을 맡은 현두륜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것으로 이로 인해 기초생활수급대상 자격 등이 박탈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 고법 재심리 아직 어떻게 끝날지 몰라


대법원에서 원심을 기각해 돌려보냈지만 재판이 끝난 것은 아니다. 현 변호사는 “에이즈 혈액으로 만든 혈우병 치료제가 원인이라는 사실이 뒤집히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손해배상액에 대해서는 논의를 해봐야 안다”고 말했다. 고법은 내년 2월 녹십자홀딩스 측과 조정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조정이 안 되면 다시 재판을 해야 한다.

녹십자 측을 변호한 법무법인 태평양 측은 “혈우병 치료제에 문제가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면서 “판결문을 분석해 대응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 결정적 증거 밝혀낸 조영걸 울산대 의대 교수 ▼


조영걸 울산대 의대 교수는 혈우병 치료제를 맞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20년간 애써 왔다. 조 교수가 대법원 판결문을 내보이고 있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dream@donga.com

“이제야 그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렸을까요. 소송을 진행하면서 온 세상과 싸우는 느낌이었습니다. 문제의 치료제를 만든 녹십자홀딩스 측이 혈우병 환자들의 아픔을 조금만 더 배려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요.”

8년에 걸친 혈우병 환자들의 집단 에이즈(AIDS) 감염 사건 소송에서 핵심적인 유전자 증거를 제시해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조영걸 울산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49)는 “길고 긴 싸움이 이제야 끝이 보인다”며 기뻐했다.

조 교수가 에이즈와 혈우병 환자를 연구하게 된 것은 박사과정 중 병역 의무로 국립보건원 에이즈과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면서다. 혈우병 환자 집단에서 에이즈 감염이 파악된 것은 1990년이 처음이며 1991년도에는 3명이나 발생했다.

“당시 에이즈가 발생한 지역에 출장을 가서 역학 조사를 하고 혈액을 채취하고 주의사항 등을 알려줬지요. 그때만 해도 좀 이상하게 여겼을 뿐 대단하게 생각하진 못했어요.”

그런데 이듬해 혈우병 환자 중 에이즈 감염자가 무려 12명이나 발생했다. 조 교수는 ‘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에도 혈액 치료제 문제로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해 보니 이들의 바이러스 유전자가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것을 1994년에 알았다. 그는 “아무래도 환자들이 복용했던 국산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염된 것 같았다”며 “당시 혈우병 치료제는 일반인의 매혈액으로 만들었는데 에이즈에 걸린 줄 몰랐던 사람의 피가 혈우병 치료제에 섞여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교수는 역학조사를 통해 매혈자인 에이즈 감염자 오모 씨와 김모 씨의 혈액을 이용해 혈우병 치료제를 만들었다는 걸 밝혀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이 치료제를 맞은 혈우병 환자 20명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됐다는 것이다. DNA 조사를 통해 이 사실을 부분적으로 증명해 논문으로 발표했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2001년 바이러스학회 추천 우수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동아일보가 이 논문을 보도하지 않았다면 진실은 그대로 묻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송이 쉽지는 않았다. 1심에선 일부 승소했지만 2심에선 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15억 원짜리 명예 훼손 소송도 걸렸지만 승소했다.

“그때 동료 교수를 비롯해 주위의 격려가 정말 힘이 됐어요. 다시 힘을 얻어 그동안 보관해 뒀던 사건 당시 환자들의 혈청을 원료로 DNA를 다시 분석해 두 편의 논문을 올해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어요. 증거를 더 보강하고 싶었거든요.”

새로 연구한 논문은 대법원 판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거보다 명확하게 DNA를 구분해냈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거예요. 그때는 29세 젊은이의 피 끓는 분노로 시작했지요. 혈우병 환자들 참 힘들게 살아요. 혈우병은 모계로 유전돼요. 환자의 어머니는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요. 거기에 에이즈까지 걸려 보세요. 그때는 에이즈에 대한 차별이 말도 못했어요. 말 그대로 천형이었죠. 그들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김규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youta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이영혜 채널A 기자 yh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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