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인품 좋은 신사에게 판정 맡기다 1883년 첫 직업심판

입력 2014-05-09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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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L 심판의 역사…그들은 어느 별에서 왔나?

1846년 첫 ‘선수-심판 분쟁’…심판이 이겨
1882년부터 판정 번복·선수와 대화 금지
이후 심판 권위 강화 규정들 급속히 늘어나
20세기 들어 구심-부심 각각 업무 세분화
2심제로 출발해 4심제는 1952년 자리잡아


프로야구 30여년 역사에서 요즘처럼 심판들이 뭇매를 맞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특정 시기에 심판 판정에 문제를 삼는 사람은 있었지만 최근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는 직업이 심판이기는 하다. 그래서 “오늘 경기에서 누가 진행을 했는지 모든 사람들이 모를 정도가 돼야 명심판이다”는 말이 메이저리그에는 내려온다. 선수 관중과 함께 경기를 구성하는 3대 요소 가운데 하나인 심판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메이저리그 역사에 기록된 심판에 얽힌 히스토리를 모아봤다.


● 태초에 야구가 있었고 심판이 있었다.

1845년 최초의 야구 룰이 만들어졌다고 메이저리그 역사는 말하고 있다. 1834년 혹은 1842년 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뉴욕 니커보커스가 공식 룰을 제정한 것을 시초로 본다. 당시 룰에 따르면 선수 구성은 9명이고, 알렉산더 카트라이터가 디자인했다는 경기장 규격을 사용했다. 경기 방식은 지금 같은 9이닝 경기가 아니었다. 먼저 21점을 먼저 내는 팀이 이겼다. 각 팀은 같은 수의 타석 기회를 가졌지만 방망이의 크기나 사이즈에는 제한이 없었다. 이 규정은 심판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1846년 최초로 선수와 심판간의 분쟁이 발생했는데 심판이 이겼다. 심판은 1858년 중요한 권리를 가졌다. 처음으로 스트라이크를 판정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헛스윙만 스트라이크로 인정됐지만 이 권리 이후 심판의 판단이 중요해졌다. 심판의 역할이 커지자 누가 심판을 맡을지가 경기의 중요한 변수가 됐다. 홈팀이 선정한 주심 1명이 경기를 관장했다. 홈팀이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 있었다. 공정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1860년 양 팀의 주장에 의해 심판이 선정되는 것으로 변경했다. 심판은 경기를 연기시키는 권한도 가졌다. 또 공이 파울로 되면 반드시 콜을 해야 했다.


● 야구가 발전하면서 커진 심판의 역할

1861년부터 심판은 경기 뒤 승리 팀을 선언하고 두 팀이 필드를 떠나기 전에 그 결과를 스코어북에 기록해야 하는 의무를 졌다. 1865년 경기 결과를 반드시 스코어북에 기록하는 업무도 떠맡았다. 1876년 내셔널리그가 만들어졌다. 심판이 “플레이”라고 선언해야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 도중 야수가 공을 제대로 잡았는지 여부를 심판이 보지 못했을 경우 심판은 관중과 선수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요즘이라면 난리가 날 룰이었다.

리그가 정착되면서 고정적으로 경기를 관장할 심판이 필요했다. 내셔널리그가 1877년 처음으로 심판을 선정했다. 기준이 의미심장했다. 야구경기가 열리는 도시에 거주하는 인품이 있는 3명의 신사를 기준으로 했다. 원정 팀은 경기 개시 최소 3시간 전에 이 가운데 한 명을 심판으로 선정해 판정의 공정성을 높였다. 1878년 심판 수고비는 홈팀이 부담하며 비용은 경기당 5달러라고 확정했다.

내셔널리그는 1879년 연고 팀을 가진 도시와 인근에 사는 사람 가운데 심판에 적합한 사람 20명을 선정해두고 이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해 경기를 진행시켰다. 1883년까지 시행됐고 이 기간동안 심판비와 부대비용은 원정팀에서 부담했다. 공정성을 가진 심판은 무서운 권리를 하나 더 가졌다.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벌금을 매길 수 있었다. 10달러에서 20달러 사이였다. 비로 경기가 30분 이상 지연될 경우 경기를 중단할 권리도 가졌다. 1881년 심판에 욕을 하거나 모욕을 준 관중은 경기장에서 퇴장시키도록 했다.


●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직업의 탄생

1882년 심판은 가장 고독한 존재가 됐다. 자신의 판정을 번복할 수 없게 됐으며 관중 혹은 선수와의 대화가 금지됐다. 최초의 불행한 사건도 나왔다. 리그 최초의 심판 부정행위가 발각됐다. 리처드 히그햄이라는 심판이 도박사와 공모한 혐의로 추방됐다. 1883년 유급 심판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프로야구 심판이라는 직업이 탄생한 것이다.

1886년 심판은 경기 도중 아무 때나 새 볼로 교체를 해줬다. 이전까지는 볼을 잃어버리면 팀에게 5분의 여유를 주고 찾으라고 했고, 그때까지 찾지 못할 경우에만 새 볼을 줬다. 이후 심판은 주머니에 항상 2개의 볼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관중들은 심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중이 난동을 부릴 경우 경기를 끝낼 수 있도록 힘을 줬다. 심판과 논쟁을 벌이거나 판정에 항의를 할 경우 벌금 상한선은 10달러로 낮췄다. 1890년 심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처음으로 심판을 ‘미스터 엄파이어’라고 부르도록 했다. 이전까지 심판을 대하는 얼마나 태도가 나빴는지 이 항목 하나로 설명된다.

1895년 관중들의 소요로 경기가 15분 이상 지연될 경우 몰수게임을 선언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리를 심판에게 줬다. 1896년 심판에게 욕을 하는 선수나 코치에게 25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첫 번째로 어기는 선수는 벌금이 5∼10달러였고 두 번째로 어기는 선수는 벌금 25달러와 경기 퇴장이 가능했다. 세 번째 걸리면 반드시 퇴장이었다. 1908년 월드시리즈 때 최초로 4명의 심판이 투입됐다. 보통 경기 때는 2명의 심판이 경기를 진행했다.


● 4심제와 조장 심판의 업무가 세분화되다

1909년 모든 월드시리즈 경기에 4명의 심판이 투입됐다. 1910년 심판내부의 조직도가 확립됐다. 구심이 조장을 맡았다. 심판은 동료의 판정으로부터 방해를 받거나 비난받지 않고 조장 심판만이 몰수게임을 선언할 수 있도록 각자의 권한과 의무를 확실하게 정했다. 팀의 주장은 심판 조장에게 선수 교체를 통고했다. 심판은 경기 전 특별한 그라운드 룰을 두 팀에 알리는 것을 의무화 했다.

1920년 심판은 경기에 참가하지만 없는 존재가 됐다. 심판을 맞힌 공은 인플레이가 된다고 했다. 심판이나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경기를 중단할 수 있었고 강우로 30분 이상 경기를 지연시킨 뒤 경기를 끝낼 수 있는 권한도 가졌다. 1933년 모든 경기에 3명의 심판이 고정적으로 투입됐고 1935년에는 최초의 심판학교가 세워졌다. 1939년부터 6명의 심판이 월드시리즈를 관장했다. 4명이 그라운드에 투입됐고 2명은 대기했다. 1952년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4심제가 일반화됐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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