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은메달’ 한국봅슬레이, 亞 역사 새로 썼다!

입력 2018-02-26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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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봅슬레이대표팀은 25일 평창 올림픽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2018평창동계올림픽 오픈 4인승에서 ‘팀플레이’를 바탕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썰매 역사를 새로 썼다. 주행을 마치고 기록을 확인한 뒤 포효하고 있는 대표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뜨거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곳곳에선 흐느낌이 뒤섞인 포효가 들려왔다. 6000여 관중이 가득 들어찬 경기장은 이처럼 감동의 물결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한국봅슬레이가 마침내 아시아 동계스포츠 역사를 새로 썼다. 원윤종(33)-전정린(29·이상 강원도청)-서영우(27·경기BS연맹)-김동현(31·강원도청) 조는 25일 알펜시아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봅슬레이 남자 4인승 최종 결선에서 꿈에 그리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3·4차 시기에서 각각 48초89와 49초65를 기록하고, 앞선 1·2차시기를 합쳐 전체 공동 2위에 올랐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 최초로 동계올림픽에서 봅슬레이 메달이 처음 나오는 순간이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변방에서 세계무대 중심으로

한국봅슬레이는 그 존재 자체가 도전의 역사였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제대로 된 트랙과 썰매조차 없던 허허벌판에서 시작해 누구보다 뜨거운 땀과 눈물을 흘렸다.

봅슬레이는 다른 동계종목보다 한참 늦게야 한국 땅을 밟았다. 2000년을 전후해 강광배(45) 교수가 ‘선구자’ 노릇을 하며 종목을 전파했지만, 관심을 가진 이는 많지 않았다. 인프라가 너무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1000억원 이상이 드는 트랙은커녕 수천만원에 이르는 썰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필수 자양분이 없는 상황에서 종목 발전은 꿈꿀 수도 없었다.

그러나 2009년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봅슬레이라는 종목이 알려진 뒤 2011년 평창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매력을 느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지원도 갈수록 풍족해져갔다.

이후 우리 소유의 썰매와 트랙을 품게 된 봅슬레이는 몰라보게 발전했다. 변방에서 세계무대 중심으로 가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처음 올림픽 무대를 밟았던 한국봅슬레이는 8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럽과 북미의 강세 속에서 아시아 선수들도 할 수 있다는 지표를 세웠다”는 파일럿 원윤종의 소감처럼 이날 결과는 참으로 뜻 깊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공동은메달…. 마지막까지 가슴 졸이다

다만 메달이 걸린 3·4차시기는 마지막까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3차시기 두 번째 순서로 출발한 한국은 48초89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스타트 기록이 4초94로 좋지 않았지만 승부처인 9번 코스를 충돌 없이 빠져나와 기록을 단축시켰다.

그런데 4차시기에서 변수가 생겼다. 한국보다 바로 앞서 출발한 독일 니코 발터-케빈 쿠스케-알렉산더 뢰디거-에릭 프랑케 조가 48초90을 기록하면서 한국을 턱밑까지 추격한 것이다. 자칫 2위 자리까지 위태로운 상황. 그러나 한국은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최종 4차시기에서 49초65를 기록하고 기존 순위를 놓치지 않았다. 다만 공교롭게도 앞 조와 4차 합산 성적이 100/1초까지 동일해 두 조는 공동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든 레이스를 마친 선수들은 곧 4차시기 기록을 확인한 뒤 서로를 얼싸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산만한 덩치를 지닌 이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포효했다. 이를 지켜보던 코칭스태프와 관중들도 어느덧 눈가도 붉게 물들었다. 환희와 감동이 교차했던 평창의 마지막 하루였다.

평창 | 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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