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감독, 세계를 품었지만 한국을 못 품은 남자

입력 2011-06-1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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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차갑다. 달(Moon)이라고 불리던 그의 눈빛이 바로 그랬다. 경기 전 취재진과의 담소 중에도 항상 그의 시선은 그라운드를 향하고 있었고, 잠시라도 한 눈을 파는 선수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맺고 끊음이 분명한 그의 성품은 ‘승부사 김경문’의 밑바탕이었다.스포츠동아DB

김경문 감독은 어떤 사람?
2003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두산 지휘봉
베이징올림픽 일본 등 꺾고 金…위상 격상
6번 PS행에도 번번이 우승 문턱서 좌절
김경문(53) 감독은 온화한 모습과 달리 맺고 끊음이 확실한 지도자였다. 2003년 10월 전임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두산의 새 사령탑으로 취임할 때부터 이번에 과감하게 감독직을 버리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시종일관 ‘외유내강’의 면모를 발휘했다. ‘의리’를 중시하고, ‘소신’에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2003년 10월 두산은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을 낙점하고 사실상 공개협상을 벌였다. 이 와중에 김인식 감독은 자진사퇴를 선언했으나 선동열 위원이 계약조건에 난색을 표하며 협상이 깨지자 두산의 감독직은 돌연 무주공산이 됐다. 결국 당시 김경문 배터리코치가 최종적으로 두산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1998년부터 그해까지 6년간 ‘모셨던’ 스승이 물러나자 김경문 코치 역시 다음 시즌 롯데에서 새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친정에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졸지에 감독직이 공석이 된 두산 구단이 전격적으로 김경문 코치를 붙잡으면서 ‘김경문 감독’이 탄생했다.

당시 김경문 감독의 최후 경쟁자는 양승호 수비코치(현 롯데 감독)였다. 이런 배경 속에 출발한 탓에 ‘김경문 체제’의 안정화를 점친 야구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2004년 팀을 정규시즌 3위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킨 데 이어 2005·2007·2008년 등 3차례에 걸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으며 두산을 2000년대 중·후반 프로야구의 강자로 성장시켰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달리 무게 있는 말 한마디 또는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조치(대부분 ‘신상필벌’에 의거한다)로 개성 강한(혹은 이기적인) 두산 선수단을 철저히 장악한 결과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지도자 김경문에게는 큰 전환점이었다. 2007∼2008년 2년 연속 숙적 SK의 벽에 막혀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그치며 한계도 노출했지만 베이징올림픽에서 그는 한국야구와 더불어 자신의 위상 또한 한 단계 격상시켰다.

그해 말 ‘100년에 한번 이룰까 말까한 업적을 한국야구사에 남겼다’고 치하하자 김 감독은 대뜸 “그것도 전승으로”라고 답한 적이 있다. 의리와 소신의 근원격인 ‘자부심’과 ‘자존심’ 또한 대단한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김경문 감독은 2008년 말 송년회를 겸해 담당기자들을 저녁식사에 초청했다. 이 자리에는 일부 구단 직원도 동석했다. 김 감독은 직원들을 향해 “오늘은 내가 호스트다. 괜히 나 몰래 계산서를 갖고 나가지 말라”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경계’가 뚜렷한(때론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2006년을 제외하곤 매년 두산을 가을잔치로 이끌었지만 단 한번도 마지막에 웃지 못한 김경문 감독. 그렇기에 올시즌 더욱 의욕적으로 출사표를 내던졌지만 채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그만 야인의 길을 택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럴 줄 알았다”고 반응한다.

정재우 기자 (트위터 @jace2020) jac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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