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토크①] 김기천, 필모그래피만 3페이지…모두가 찾는 착한 배우

입력 2017-04-19 10: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처음에는 연기가 정말 좋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너무 부끄러웠다. 날마다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배우 김기천(60).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를 통해 충무로에 데뷔했다. 25년 이상을 연기와 함께 살아왔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 석 자는 어쩌면 조금 낯설다. 김기천은 그의 이름 대신 ‘7번방의 선물’ 서노인으로, ‘곡성’ 파출소장으로, 최근에는 ‘조작된 도시’ 여백의 미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그렇게 약 90여 편의 작품 속 캐릭터로 연기 인생을 채워왔다.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나.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제가 연기 베테랑이라고요? 속으신 것 같은데…. 하하. 아무 것도 없는 빈 껍데기 같은 인생이랍니다. 특별히 가진 것도 없고, 잘나지도 않아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김기천은 손사래를 쳤지만 필모그래피만 3페이지를 훌쩍 넘겼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과한 겸손으로 들릴 만큼 조단역부터 주연작까지 촘촘하고 견고했다. 흥미로운 점은 연기의 출발점이 1990년대 초반이라는 것. ‘환갑’ 김기천의 시간을 역으로 달려보니 30대 중반이었다. 어떻게 그는 뒤늦게 시작한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됐을까. 문득 그의 처음이 궁금해졌다.

“20대요? 내가 뭐하고 살았지? 흠…. 막노동도 해보고 이것저것 여러 일을 했어요. 다 짧게 했죠. 오래 한 직업은 별로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해요. 연기는 극단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계속 해왔으니까요. 수십 년이 훌쩍 지나갔네요.”

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처음부터 배우의 꿈은 없었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김기천은 한 연극을 보고 호기심을 느꼈고 극단 아리랑에 들어갔다. 연기를 하고 싶다거나, 연출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배우들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연극하는 사람들이 신기해보였어요. 나와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사는 사람들 같았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무작정 극단에 들어갔어요.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도 받아주더라고요. 당시에는 극단에 인력이 많이 부족했거든요. 연기도 연극도 기본이 안 된 상태에서 그냥 뛰어든 거예요. 그렇게 단원으로 있으면서 [마을 사람] 같은 역할을 임시로 하곤 했죠. 연극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영화 ‘서편제’에 운 좋게 캐스팅됐어요. 당시 ‘서편제’의 남자 주인공이 극단 단장(김명곤)이었는데 ‘단원들에게 작은 역할이라도 달라’고 부탁한 덕분이었죠.”

떨림을 넘어 흥분되는 마음. 김기천은 ‘서편제’의 첫 촬영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시계바늘을 1992년 어느날로 돌렸다. ‘서편제’ 현장에서 들은 임권택 감독의 쓴 소리는 연기의 모토가 됐다.

“지금이야 디지털 시대지만 그때는 필름으로 촬영하던 때거든요. NG를 내면 필름 값, 모두 제작비로 연결됐어요. 촬영에 앞서 첫 번째 리허설을 하고 나서 임권택 감독님이 저에게 ‘연기하지 마세요’라고 지적하는 거예요. 속으로 ‘연기하러 왔는데 나더러 연기를 하지 말라고?’ 했죠. ‘연기를 꾸며서, 가짜로 하지 말라’ ‘진심을 담아서, 있는 그대로 느껴지게 해 달라’는 주문이었어요. 지금도 그 말이 항상 생각나요.”

영화 ‘7번방의 선물’과 ‘이층의 악당’의 한 장면.


영화 현장은 무대와 또 다른 경험이었다. 김기천은 하루하루 넘치는 재미를 느꼈지만 마음 속 짐을 떨치지 못했다. 스스로 판단할 때 ‘기본기 없는 연기’는 매번 한계를 실감하게 했다. 국가공인자격증이라도 있으면 취득하겠다만 연기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남에게 드러낼 수 없던 이 고민은 쉰을 넘기고서야 극복했다.

“멋진 배우들처럼 연기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현장에 가면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했지만 부담이 컸죠. 그런데 2007년 즈음인가. 하루는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찜찜한 느낌이 전혀 없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연기하면서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내려놓았기 때문이었어요.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연기도 더 재밌어지고요. 그걸 이제야 깨달았는데, 몸이 이미 늙어버린 거죠. ‘알지도 못하면서 잘 하려고 포장하고 꾸미려고 했구나’를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후배들에게 ‘힘 빼’라고 아무리 말해도 경험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60대 배우 김기천의 행보는 올해도 쉼이 없다. 지난 2월 영화 ‘조작된 도시’로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그는 5월 첫방하는 드라마 ‘7일의 왕비’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그에게 소회와 더불어 연기에 대한 신념을 물었다.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는데 바보처럼 연기만 하다가 세월이 훌쩍 지났네요. 배우가 되는 것도, 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도 참 힘든 세상이죠. 결국은 ‘누가 더 오래 버텨내느냐 못 버티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배우뿐 아니라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연기가 없었다면 제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싶어요. 연기는, 제 인생을 구원한 고마운 존재죠. 배우는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직업인 것 같아요. 연기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