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엔트리 잔혹사의 교훈 “선발 잣대는 엄격해야한다”

입력 2018-05-24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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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날이 2002년 5월 1일이다. 한일월드컵 개막을 한달 앞둔 시점에 발표된 대표팀의 엔트리는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지휘봉을 잡은 1년 반 동안 선수는 물론이고 취재진과 끊임없이 밀당(밀고 당기기)을 해왔던 히딩크 감독의 속마음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공개된 엔트리에서 공격은 신구 조화, 수비는 노련미, 그리고 중원은 파워에 방점을 찍었다.


모두가 놀란 결과는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이동국의 탈락이었다. 히딩크는 “이동국도 훈련 캠프에서 열심히 했는데, 공격수가 많아 누군가를 탈락시켜야 하는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내린 결론”이라고 설명했다. 잣대는 체력과 투쟁심이었다.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가차 없었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골드컵에서 플레이할 당시 이동국.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0년 6월 1일의 기억도 생생하다.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중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할 엔트리가 발표됐는데, 이근호와 신형민, 구자철이 제외됐다. 수비수 곽태휘는 전날 벨라루스 평가전에서 부상당했다.


가장 충격이 컸던 탈락자는 이근호였다. 최종예선에서 종횡무진하며 본선 티켓을 따내는데 큰 공을 세운 공격수였지만 마지막에 눈물을 흘렸다. 허정무 감독은 발표 전날까지도 고민이 깊었다. 그는 “이근호에게 기회를 많이 줬지만 슬럼프가 너무 길었다. 선수는 경기장에서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서로 마음이 상해도 어쩔 수 없다”며 단호함을 보였다. 선발 기준은 현재 컨디션과 본선 경쟁력이었다.


2014년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엔트리가 발표되자 찬반으로 갈렸다. 지휘봉을 잡은 기간이 겨우 1년에 불과해 시간적인 한계가 컸던 홍명보 감독은 자신이 잘 아는 선수 위주로 팀을 꾸렸다. 그러자 ‘제 식구 감싸기’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소속팀에서 뛰지 못해 경기 감각이 떨어진 박주영의 선발은 큰 논란이 됐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 박주영.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과거의 엔트리 발표가 생각난 건 조만간 비슷한 광경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김민재(전북) 염기훈(수원)에 이어 소집 명단 발표 이후 권창훈(디종) 이근호(강원)가 부상으로 제외되면서 대표팀은 ‘부상 쓰나미’에 떨고 있다. 본격적인 담금질을 앞둔 신태용 감독은 애간장이 탄다. 하지만 추가발탁 없이 26명으로 가겠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이들 중 23명은 러시아에 가고, 3명은 탈락하게 된다.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하는 엔트리 선발이야말로 감독 입장에서는 어려운 결정이다. 특히 이번에는 엔트리가 공개될 6월 2일까지 변수가 많아 예측도 쉽지 않다.


우선은 신 감독의 전술적인 고민이다. 당초 구상은 4백이지만 이젠 3백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다. 6명의 중앙 수비수 중 자신의 전술에 맞는 선수를 고르는 작업이 중요하다. 또 수비수끼리의 궁합도 고려해야한다.


멀티 자원의 활용도 변수다. 중앙 미드필더 기성용을 포함해 DF와 MF 역할이 모두 가능한 장현수와 박주호, 김민우, 고요한 등의 활용방안도 고민 중이다. 사실상 수비수와 미드필더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2018 러시아월드컵을 대비하는 축구대표팀이 23일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훈련을 가졌다. 대표팀 이청용이 훈련을 하고 있다. 파주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깜짝 발탁한 오반석과 문선민, 이승우가 기대에 부응할 지도 궁금하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의 플레이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또 소속팀에서는 뛰지 못했지만 풍부한 경험 덕분에 선발된 이청용의 경기력도 관심거리다. 과거의 경험만으로 본선무대에 데려가기엔 명분이 약하다.


재활 중인 김진수의 회복여부도 관건이다. 본선행이 불투명한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다.


마지막 변수도 남았다. 추가 부상자다. 엔트리를 놓고 내부 경쟁을 펼치다보면 의욕이 넘치고, 자칫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서로가 조심해야할 시점이다. 신 감독은 엔트리 선발 기준으로 ‘희생정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맘때의 선수 중 희생정신이 결여된 선수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컨디션을 꼼꼼히 살폈으면 한다. 이름값이 아니라 진짜 우리 대표팀에 필요한 선수를 골라내는 작업이야말로 감독이 해야 할 최우선 과제다.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현재의 능력만으로 평가했으면 한다. 그래야 탈락하는 선수도, 이를 지켜본 팬들도 수긍할 수 있다. 또 이런 잣대는 살아남은 태극전사들의 결속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2002년의 4강, 2010년의 16강이 말해주듯 냉정하게 뽑은 엔트리는 성적으로 보답한다. 엔트리 선발부터 앙금이 남는다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체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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