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피플] KIA이용규‘3할때리고, 25개훔치고’…이것이내컨셉트!

입력 2008-09-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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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바꾼 트레이드 테이블 이용규(23)란 선수에 대한 첫 기억은 2004년 가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스트시즌에서 멀어지자 확대 엔트리에 맞춰 ‘리빌딩’에 돌입한 LG는 고졸 루키 외야수 이용규를 1군으로 올렸다. 자그마한 체구에 마쓰이 가즈오를 닮은 외모, 그 외엔 별 인상이 없었다.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한 건 그로부터 몇 달 후. LG는 그해 11월2일 홍현우와 이용규를 KIA로 보내고, 이원식·소소경을 영입하는 2:2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당시 포커스는 홍현우의 고향팀 복귀와 이원식·소소경 영입에 따른 LG 마운드의 보강에 맞춰졌다. 이용규는 거기 따라가는 조각 정도로 치부됐다. 당시 이용규를 ‘선선히’ 내준 LG의 셈법을 떠올리자면 “외야에 유망주를 키울 자리는 하나뿐이다. 그 후보는 오태근과 이대형, 이용규인데 셋의 스타일이 비슷하다면 하드웨어(체격)가 가장 처지는 이용규를 내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였다. 반면 이용규를 받은 KIA의 시각은 달랐다. 유남호 당시 KIA 감독은 “삼성에서 KIA로 넘어와 2군 감독을 했는데 LG와 경기 때 가장 눈에 띈 선수가 이용규와 이대형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용규가 배팅 센스에서 우위여서 트레이드 협상부터 이용규를 점찍어서 달라고 했다. KIA 외야진의 세대교체를 위해서 이용규와 김원섭을 ‘양아들’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믿고 기회를 줬다”라고 회고했다. 실제 유 감독 지시 아래 박철우, 백인호 코치가 이용규를 집중 조련했다. 이적 직후 발목이 좋지 않았는데도 마무리 훈련지인 제주도 캠프에 합류시켰다. 시범경기부터 주전으로 쓰더니 2005년 124경기에 출장시켰다. ‘잘해야 내보내느냐 내보내줘야 잘하느냐’는 닭과 달걀의 물음에 이용규는 “꾸준히 출장하다보니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LG는 이용규가 아니라도 대체자원이 풍족했다. 반면 KIA는 외야의 세대교체가 급했다. 때문에 완벽한 선수를 찾던 LG에겐 이용규의 단점이 눈에 들어왔지만 KIA는 장점을 먼저 봤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팜의 환경 차이가 양 구단의 운명을 갈랐다. KIA는 ‘원툴(발)’을 높이 샀지만 상자를 열어보니 이용규는 그 이상이었다. ○‘한국적 야구’의 아이콘 그로부터 약 4년이 흐른 2008년 9월. 이용규 류(類)의 야구 스타일은 미국, 일본과 차별화되는 ‘뉴웨이브 베이스볼’의 상징처럼 떠올랐다. 강인한 정신력과 지옥훈련에 바탕을 둔 체력. 스피드와 정교함, 팀플레이…. 김경문, 김성근 감독 등이 구사하는 한국적 야구에 이용규는 딱 부합하는 플레이어다. 심지어 미국야구에 물든 롯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용규는 “내 스윙으로 홈런을 몇 개나 치겠나. 홈런 10개 타율 0.260보다 타율 3할 출루율 4할 도루 25개 이상이 내 컨셉트”라고 말한다. 통계를 봐도 2005시즌 5홈런을 친 이후 3년간 홈런은 딱 1개뿐이다. 이용규는 “내가 봐도 맞히는 재주는 타고난 것 같다. 투 스트라이크 노 볼에서도 맞힐 수 있다는 자신감은 늘 있었다”라고 고백한다. 놀랍게도 2006년 이후 3년간 이용규는 삼진보다 볼넷이 더 많다. 한국적 야구로 일궈낸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에 대해서도 이용규는 “저마다 맡은 역할을 했다. 빠른 야구도 됐지만 이대호-김동주-이승엽 선배가 잘 해주셨다. 좌투수 나와도 선발 출장할 줄은 솔직히 나도 예상외였지만 컨디션은 좋았다. 4강 일본전에서 9회 마지막 아웃 공을 잡은 뒤엔 ‘너무 힘들었는데 끝났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회고했다. 인터뷰 당시 이용규는 수염이 덥수룩했는데 “올림픽 예선부터 징크스 삼아 면도를 안 했는데 계속 이기길래 (지금도) 기르고 있다”고 말했다. ○야구계의 편견에 맞서 야구인들은 대체적으로 큰 선수를 선호한다. 이용규가 LG에서 KIA로 팔려간 결정적 이유도 체구였다. 그 전에도 이용규는 ‘차별’을 받아왔다. 작은 키 탓에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덕수정보고)를 찾아야 했고, 프로 입단 당시에도 1차 지명(2차 2순위)을 받지 못했다. 이용규는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 있어서 키 스트레스는 별로 없었다”고 했지만 정작 아버지의 가슴엔 한(恨)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용규, 이종욱(두산), 정근우(SK) 등은 왜소한 체구 탓에 기존 야구계 진입부터 외면 받았고, ‘머니볼’이 선호하는 타자 유형도 아니지만 한국야구의 신주류로 떠올랐다. 태생부터가 ‘한국적인’ 그들이다. ○몬스터 시즌은 현재진행형 이용규는 KIA 이적 둘째 해인 2006년 최다안타와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그를 떠나보내고 LG가 남겨놓은 어떤 외야수도 해내지 못한 성과였다. 2007년 발목에 뼛조각이 돌아다니는 통증 속에서도 수술 없이 재활치료만 받고 풀 시즌을 소화했다. 이어 2008년 다시 몬스터 시즌 모드로 돌입했다. 15일까지 그의 성적은 106경기 130안타 타율 0.312, 출루율 0.385, 28도루. 그러나 이용규는 “최다안타왕 욕심은 없다. 타율 3할을 이뤘으니 됐다”고 말했다. 몸쪽 볼 대처가 강해졌다는 평가에 대해선 “원래 약하지 않은데다 올해 훈련량이 많았고 조범현 감독과 박흥식 타격코치 주도로 폼을 교정한 뒤 더 자신이 생겼다”고 했다. 고참급은 아니지만 주축 선수로서 KIA가 ‘한국의 양키스’로 불리지만 성적은 안 나는 데 대해 이용규는 “고비 때마다 꼬이는데 어디까지나 (감독이 아닌) 선수 잘못”이라고 책임을 통감했다. 광주 |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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