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살롱최은진,경상만요부르다

입력 2008-11-10 03: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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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어라고 저 목소리를 묘사해야 ‘타당’할까? 9일 오후 4시 연극배우 최은진(48)의 ‘천변풍경 1930’을 본 뒤 든 생각이었다. 하루로는 모자라다. 이틀을, 삼일을… 몇 번의 무대를 더 보아야만 정답을 낼 수 있을 것인가. 단 하루, 그것도 90분만으로는 너무나 짧게 느껴진 무대였다. ‘천변풍경 1930’은 이상은, 백현진, 강산에, IS, 최은진 등 5명의 아티스트가 근대를 주제로 꾸며낸 두산아트센터의 기획콘서트였다. 각기 다른 출연진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발산됐고, 그 시대 분위기를 흑백 영상과 음악으로 고스란히 무대에 녹여냈다. 일제시대라는 우울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개인’을 찾고자 고군분투했던 안타까운 풍경, ‘갓’과 ‘맥고모자’가 한 공간에 존재하던 때였다. 구식과 신식이 뒤범벅돼 가치관은 혼란스럽지만, 그렇기에 더욱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잉태되던 1930년대! 출연진들은 당시 분위기를 소극장 무대 위로 다채롭게 옮겨왔다. 특히 ‘천변풍경 1930’의 마지막 날 최은진의 무대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자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흑백영화 성우처럼 교태와 아양으로 무장돼 과장된 것 같지만, 옆 집 아주머니의 목소리마냥 익숙했다. 간드러지며 애간장을 태우는 듯해도 한편으로는 투박하고 담담해 묘하게 특별했다. 지극히 다중적인 목소리였다. 그가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왕서방 연서’를 부르는 순간, 최은진이 아니라면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멋스러움이 소극장을 가득 채웠다. “열일곱 살 최은진입니당~”이라며 짐짓 귀여운 모습으로 첫인사를 하고,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를 첫 곡으로 뽑은 그는 내리 12곡의 경성 만요와 10분이 넘는 ‘아리랑 데자뷔’를 앙코르곡으로 들려주었다. 경성만요는 일제 시대 조선에서 불린 일련의 코믹송을 일컫는 말로, ‘오빠는 풍각쟁이(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사람)야’가 대표적인 곡으로 알려져 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가 월급이 안 오른다고 짜증내고, 날마다 회사는 지각하고, 밤늦게 술 취해 들어온다는 당시 한량을 묘사한 것처럼, 다른 경성 만요도 당대 분위기를 익살맞게 묘사해 감칠맛을 냈다. ‘엉터리 대학생’이라는 노래는 “공부냐 다마쓰끼(당구)냐 공부냐 다마쓰끼냐” 고민하며 정신 못 차리는 “우리 옆집 대학생 호떡주사 대학생”에 대해 노래한다. ‘신접살이 풍경’은 “핸드빽하고 파라솔도 사주마” 했지만, 자정이 넘어서도 집에 오지 않는 야속한 남편에게 “얼른 오세요, 네!, 사다주세요, 네!, 같이 가세요, 네!”라며 앙탈부리는 노래다. 공연 내내 노래 한곡마다 노래 배경에 맞는 옛날 신문 기사나 사진, 흑백 영화를 보여주며 최은진이 직접 설명을 곁들였다. 음악 콘서트만으로도 한정지을 수 없고, 연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색다른 연주회였다. 바이올린을 맡은 ‘두 번째 달’의 조윤정은 레이스 보풀이 화려한 흰색 실크 블라우스에 커다란 검정 벨트, 긴 검정 치마를 입고 모던걸의 모습을 보여줬다. 아코디언의 하림은 회색 베레모에 회색 정장 바지, 흰 와이셔츠로 자칭 “홍난파 끄나풀입니다”로 자신을 소개하며 “사랑에 실패한 후 저 멀리 나성(LA)으로 도망가서 집안 재산 탕진하고 돌아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기타의 이호석은 빨간 나비넥타이, 멜빵을 걸치고 독립운동 언저리를 돌았으나 독립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한 1930년대 청년을 연출했다. 이들의 기타, 아코디언, 바이올린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흥겹지만 애잔한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최은진의 목소리를 받쳐주었다. 특히 하림은 최은진과 듀엣으로 ‘활동사진 강짜’를 직접 불러 박수를 받았다. ‘활동사진 강짜’는 연인이 활동사진의 외국 배우 얼굴을 보다가 각기 남녀배우에게 반해서 서로 바가지를 긁으며 극장에 못 가게 하는 내용의 익살스러운 노래다. “아 도무지 코 틀어막고 답답할 노릇”이라며 서로를 답답해하는 가사가 재미있다. 만가라고 해서 다 웃긴 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방의 푸른 꿈’은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흐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며 흘러간 옛 기억을 부르는 곡이고, “안녕하십니까요 네 염려하여주심으로 저는 잘 있습니다 그런데 여보 여보 어쩌면 회답 한 장 없이 고렇게 고렇게 모른 체 하십니까요”라고 노래하는 ‘님전상서’는 최은진의 구슬픈 목소리를 뽑아내는 애잔한 곡이었다. 이 날 공연은 여느 다른 콘서트와 달리 남녀노소 관객 폭이 넓었다. ‘두 번째 달’, 가수 하림 등 평소 마니아 팬이 많은 이들의 연주를 보기 위한 20대 팬부터 최은진의 경성만요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80대 노인까지 세대가 다양했다. 공연이 끝날 무렵, 중년 남성 관객들이 “밤 샙시다.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죠” 건의를 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공연이 끝나고도 멤버들 얼굴 한 번 보고 가자며, 바로 옆 공연장의 뮤지컬 ‘제너두’의 출연진, 슈퍼주니어를 기다리는 팬들처럼 중년 팬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천변풍경 1930’, 과거를 통해 지금의 현대인들에게 웃음과 삶의 에너지를 건넨 공연이었다. 신문명을 동경하던 ‘쁘띠 예술가’들이 가득한 청계천 풍경, 깃을 세운 하얀 와이셔츠에 뿔테 안경, 베레모가 멋스러운 도시의 젊은이들, 다방과 술집을 오가며 시대를 걱정하던 모던보이, 모던걸들은 현재의 연출력으로 다시 살아났다. 지금부터 70년이 더 흐르고 ‘천변풍경 2008’이 생긴다면, 과연 지금을 어떻게 회상하고 풍자할까? 한강을 기준으로 강남, 강북으로 나뉘고, 쉴 새 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젊은이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과 패밀리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 노숙자와 구직자가 뒤섞인 도시 풍경, 극심한 생활고와 우울증으로 하루에 8명이 자살하는 2008년 천변의 풍경은 어떤 목소리로 재생될까? 글루미한 향수로 또 하나의 예술 무대가 탄생될 수 있을까? 1930년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최은진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세월이 흐른 뒤 ‘2008년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예술가는 어떤 음색일까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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