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했죠. 매니저는 아무 말도 없고. 난 지금도 왜 글러브가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소리를 듣고 ‘X팔, 나 시합 안 해’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그런데 스텝들이 막 밀어내는 거예요. 등을 보인 상태로 밀려서 경기장으로 들어갔죠.”
챔피언 벨트를 잃은 김태식은 81년 8월 30일 안토니오 아벨라에게 도전하지만 2회 2분 46초 만에 충격의 KO패를 당하게 된다. 2회전에서 난타전을 벌이다가 아벨라의 주먹을 맞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뇌수술후 한때 사망설…권투에 환멸도
펀치를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가 등 뒤에서 날아온 ‘비인간적인’ 훅을 허용하고는 거의 링 밖으로 떨어질 뻔했던 처참한 패배였다.
1982년 9월 4일 대구. 멕시코 로베르토 라미레스과의 재기전에서 김태식은 스스로도 부끄러운 판정승을 거둔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가 4시간 30여 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선수생명뿐만 아니라 인생이 걸린 뇌수술이었다.
“1라운드에 빵! 하고 맞으면서 머리가 홱 돌았어요. 난 링에 올라가면 누구보다 독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라미레스랑 경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링 밖에 있는 동생을 보고 말을 걸었어요. 이미 정신이 나간 거지.”
경기가 끝나고 탈의실로 들어온 김태식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콜라를 달라고 하더니 피투성이가 된 두 주먹 사이에 병을 끼고 마셨다. 곧바로 호흡 곤란 증상이 왔다. 그리고 구토가 시작됐다. 거기까지가 김태식이 기억하는 전부이다.
이날 밤 대구 최고의 뇌수술 전문의 김인홍 박사는 혼자 술을 마시며 김태식의 중계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김태식이 실려 왔다.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 없었다. 수술 부위를 뜯으니 피가 팍 터져 나왔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어릴 적에 3층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다친 일이 있어요. 그때 제대로 치료를 안 한 것이 일생의 화근이 된 거죠. 사실 이미 미국에서 시합할 때부터 증세가 있었어요. 머리를 다친 상태에서 권투를 계속한 것부터가 잘못됐던 겁니다.”
LA에서 마테블라에게 패한 뒤 김태식은 병원에 갔지만 검사를 받지 않고 뛰쳐나왔다. 검사를 하면 100% 이상이 발견될 것이고 결국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권투 인생이 끝나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81년에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도망쳤다.
김태식이 뇌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들이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몇몇 언론들은 악의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특히 중계 계약 건으로 김태식을 곱지 않게 보던 한 방송사가 심했다.
맞수 박찬희와 대결 불발 지금도 아쉬워
퇴원을 해서 지난 뉴스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캄캄했다. ‘김태식이 뇌수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됐다’, ‘침을 질질 흘리고 말도 못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김태식이 죽었다’,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토록 사랑했던 권투에 환멸을 느끼고 권투계를 떠났던 김태식은 무역회사, 고깃집 등을 운영하다가 지난해 부천에 복싱짐을 열며 링으로 돌아왔다.
현역시절에 대한 아쉬움 하나. 친구이라 라이벌로 역시 WBA챔피언을 지낸 박찬희와 승부를 가려보지 못한 점이다. 아마추어 복서출신으로 올림픽에도 출전했던 박찬희가 엘리트코스를 밟았다면 김태식은 전형적인 ‘들꽃’이었다.
그래서 꼭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 돈을 안 줘도 좋았다. “누가 이겼을까”라는 질문에는 “아마, 찬희는 알 걸요?”하고 웃었다.
“권투는 팔자인데 … 운명은 기구하죠. 머리도 그렇고, 손가락도 다치고. 타고나기는 전형적인 권투인데 못 하는 입장이니.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미쳤죠. 난 미쳤어요.” 그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것은 한 존재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결국 미쳐버린 자의 주먹이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김태식 <프로필>
1957년 강원 묵호 태생 1977년 프로복서 데뷔.
MBC권투신인왕 1980년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통산전적 20전 17승 3패(13KO)
별명 : 작은 거인, 독일병정, 링의 풍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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