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s who?] 13년만에돌아온한국핸드볼신화윤경신

입력 2009-02-20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독일 쾰른시에 위치한 스포츠올림픽박물관에는 동양에서 온 핸드볼스타의 유니폼이 걸려있다. 빛바랜 유니폼에는 분데스리가 최다득점(2905골), 6회 연속 및 통산8회 득점왕에 빛나는 윤경신(36·두산)의 땀이 배어있다. 쾰른은 윤경신이 뛰던 굼머스바흐와 기차로 한 시간 거리. 굼머스바흐는 5000여석 규모의 좁은 홈구장 대신 2만석 규모의 쾰른체육관에서 자주 경기를 벌였다. 쾰른 시민들은 상대의 전담마크를 뚫고, 고공폭격을 날린 윤경신에게 열광했다. 독일에서는 핸드볼이 축구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스포츠다. 쾰른에 위치한 독일체대의 유학생 김성택(33)씨는 “독일의 젊은 층들에게는 윤경신이 오히려 차범근(56·수원삼성감독) 보다 유명한 존재”라고 했다. 그런 그가 4억 원 대의 연봉을 뿌리치고, 2008년 7월 고국에 돌아왔다. 이제 관중석의 뜨거운 열기는 느낄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불꽃 슛’을 뿜고 있다. 독일에서 한 번도 품어보지 못한 ‘우승컵’에 입을 맞추기 위해서다. 2009SK핸드볼큰잔치에 참가하고 있는 윤경신을 만났다. ○“그래, 난 꼭 독일에서 뛴다.” 17일,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두산 숙소 근처. 윤경신은 경기가 없는 날임에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오전 훈련 이후, 점심식사. 오후에만 2개의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상대 전력을 탐색하기 위해 저녁에는 핸드볼큰잔치가 열리는 부천으로 이동해야 하는 스케줄. 윤경신은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이렇게 큰 관심을 받으니 꼭 독일에 온 것 같다”며 싱글벙글 이었다. 하긴 그랬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핸드볼선수들의 베갯잇에 스민 땀과 눈물을 조금 헤아리긴 했지만, 여전히 관중석에서는 한기가 느껴진다. 윤경신이 초등학교 5학년 때 핸드볼 공을 잡은 이후 죽 마찬가지였다. 의욕이 생기다가도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고등학교 1학년 시절,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혀서 가게 된 독일전지훈련. 그곳에서 윤경신은 ‘신세계’를 봤다. 큰 대회가 아니었음에도 독일대표팀과의 경기에는 6000여 명의 관중이 몰렸다. 손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처음 느껴보는 긴장과 환희. 그때 윤경신은 결심했다. “그래, 난 꼭 독일에서 뛴다.” ○한국에서 온 크리스마스 선물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경희대 4학년이던 1995년, 세계선수권 득점왕. 대학시절, 이미 윤경신은 세계적인 공격수였다. 국가대표 골키퍼 강일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윤경신(203cm)의 슛은 옥상에서 때리는 대포알” 같았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헝가리, 프랑스 등 유럽리그에서 러브 콜을 던졌다. 하지만 소년의 꿈은 흔들림 없이 자랐다. “독일!” 데뷔 첫 해 연봉만 1억원이 넘는 초특급대우였다. 당시 국내실업초년생들의 5배였다. 1995년 12월, 윤경신은 굼머스바흐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후반전에만 출전해 6골을 넣었다”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지역신문에는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이 왔다’고 대서특필했다. ○신체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한국에서야 2m가 넘는 선수가 없었지만, 분데스리가 1부 리그(18개 팀)에는 한 팀당 1-2명씩은 있었다. 당시 윤경신의 체중은 95kg. 집 채 만한 상대 수비수들이 밀착마크 할 때면, 밀리기 일쑤였다. 구단 트레이너의 도움만으로도 부족해 사비를 털어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몸이 불자, 자신감이 생겼다. 현재 윤경신은 찰진 110kg을 유지하고 있다. 거대한 장벽은 또 있었다. 언어문제였다. 1년 늦게 입단한 덴마크선수가 더 빨리 독일어를 배우자, 동료들이 무시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게으른 선수’로 비쳐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연습이 없는 오전 시간을 활용해 학원에 다녔다. 오후 훈련을 마치고, 저녁에는 또 다시 책을 폈다. 천근만근인 몸. 하지만 감기는 눈을 부릅떴다. 결국 3년차가 되자 말이 트였다. 99년에는 독일어로 시험을 봐 운전면허까지 땄다. 동료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국 5년 만에 굼머스바흐의 주장완장을 찼다. ○“얘들아, ‘짠’하면 원 샷이다.” 10년 차 때는 굼머스바흐의 최고참이 됐다. 시즌 종료 후 파티 때도 그는 리더였다. 윤경신은 “독일의 술자리는 속전속결인 한국과는 달리, 밤새도록 이어졌다”고 했다. 맥주 한 병을 가지고 홀짝홀짝. 답답한 맏형은 결국 파란 눈의 후배들에게 한국의 주도(酒道)를 가르쳤다. “야, 무조건 ‘짠’하면 원 샷이야.” 동료들은 화끈한 술 실력을 가진 윤경신에게 또 한 번 놀랐다. 주도 뿐만이 아니다. 윤경신은 한국식 게임을 동료들에게 전수했다. 굼머스바흐 선수들은 틈이 날 때마다 ‘369게임’과 ‘31배스킨라빈스게임’을 즐긴다. ‘369’의 전주(前奏)는 무조건 한국말로 해야 한다. 윤경신은 “걔네가 지금도 (369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며 웃었다. ○굼머스바흐의 이상민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윤경신은 2006년 굼머스바흐를 떠났다. 연봉협상 중에 구단주가 언론에 “윤경신이 팀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흘렸다. 구단주의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팬도 구단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팀에 대한 윤경신의 애정을 10년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굼머스바흐는 90년대 후반부터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스폰서들은 “윤경신이 이적하면 팀에서 손을 떼겠다”고 윽박질렀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한 팀들도 많았지만 그는 의리를 지켰다. “제가 팀을 옮기면 팀이 없어진다는데, 어떻게 떠나요. ” 윤경신은 직접 발로 뛰며, 스폰서를 구했다. 기아자동차와 독일최대은행인 도이치방크가 굼머스바흐를 후원했다. ‘영원한 오빠’ 이상민(37)이 전주 KCC에서 서울 삼성으로 이적할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팬들이 구단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집회를 열었다. 요구사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윤경신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고별 경기에는 2만여 팬들이 몰렸다. 팬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의 영웅을 보내주었다.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지요. 저도 뭉클했는걸요.” ○“독일에서 못 본 우승 맛. 고국에서 봐야죠.” 함부르크에서의 2년. 준우승까지 일궜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지금이 떠날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사람도 많이 그리웠습니다. 가족들도 외로워했고요.”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독일의 유력지 슈피겔은 6회짜리 특집기사로 작별인사를 고했다. 사실 돈도 벌만큼 벌었다. 그래서 연봉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팀에는 10년 차이가 나는 후배가 있다. 심지어 두산의 홍기일(35)코치도 윤경신의 대학후배. 여전히 ‘코치’라는 호칭이 어색하다. 그러나 두산 이상섭 감독은 “세월이 흘러도 아직 윤경신을 따라올 선수는 없다”고 했다. 계약기간은 3년. 그 동안 독일에서 못 누려 본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목표다. “득점에 관한 상들은 많이 받았잖아요. 우승 말고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핸드볼큰잔치 통산 최다 골 기록은 이번 대회에서 꼭 경신하고 싶어요. 그게 큰 동기부여가 되죠.” 윤경신은 13년간 핸드볼 큰 잔치를 비웠지만 최다 골 부문 역대2위다. 1위는 536골을 기록한 백상서(40·한체대여자감독). 인터뷰 다음날 충남대전에서, 윤경신은 보란 듯이 15골을 몰아넣었다. 이제, 통산 521골. 한국에서의 새로운 도전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윤경신은 오늘도 손때와 왁스가 묻은 낡은 핸드볼 공을 다시 한 번 움켜쥔다. 의정부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