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짠’하면 원 샷이다.”
10년 차 때는 굼머스바흐의 최고참이 됐다. 시즌 종료 후 파티 때도 그는 리더였다. 윤경신은 “독일의 술자리는 속전속결인 한국과는 달리, 밤새도록 이어졌다”고 했다. 맥주 한 병을 가지고 홀짝홀짝. 답답한 맏형은 결국 파란 눈의 후배들에게 한국의 주도(酒道)를 가르쳤다.
“야, 무조건 ‘짠’하면 원 샷이야.” 동료들은 화끈한 술 실력을 가진 윤경신에게 또 한 번 놀랐다. 주도 뿐만이 아니다. 윤경신은 한국식 게임을 동료들에게 전수했다.
굼머스바흐 선수들은 틈이 날 때마다 ‘369게임’과 ‘31배스킨라빈스게임’을 즐긴다. ‘369’의 전주(前奏)는 무조건 한국말로 해야 한다. 윤경신은 “걔네가 지금도 (369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며 웃었다.
○굼머스바흐의 이상민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윤경신은 2006년 굼머스바흐를 떠났다. 연봉협상 중에 구단주가 언론에 “윤경신이 팀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흘렸다. 구단주의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팬도 구단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팀에 대한 윤경신의 애정을 10년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굼머스바흐는 90년대 후반부터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스폰서들은 “윤경신이 이적하면 팀에서 손을 떼겠다”고 윽박질렀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한 팀들도 많았지만 그는 의리를 지켰다.
“제가 팀을 옮기면 팀이 없어진다는데, 어떻게 떠나요. ” 윤경신은 직접 발로 뛰며, 스폰서를 구했다. 기아자동차와 독일최대은행인 도이치방크가 굼머스바흐를 후원했다.
‘영원한 오빠’ 이상민(37)이 전주 KCC에서 서울 삼성으로 이적할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팬들이 구단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집회를 열었다. 요구사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윤경신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고별 경기에는 2만여 팬들이 몰렸다. 팬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의 영웅을 보내주었다.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지요. 저도 뭉클했는걸요.”
○“독일에서 못 본 우승 맛. 고국에서 봐야죠.”
함부르크에서의 2년. 준우승까지 일궜지만, 마음이 허전했다. “지금이 떠날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몸이 예전 같지 않더라고요. 사람도 많이 그리웠습니다. 가족들도 외로워했고요.”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독일의 유력지 슈피겔은 6회짜리 특집기사로 작별인사를 고했다.
사실 돈도 벌만큼 벌었다. 그래서 연봉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팀에는 10년 차이가 나는 후배가 있다. 심지어 두산의 홍기일(35)코치도 윤경신의 대학후배. 여전히 ‘코치’라는 호칭이 어색하다. 그러나 두산 이상섭 감독은 “세월이 흘러도 아직 윤경신을 따라올 선수는 없다”고 했다.
계약기간은 3년. 그 동안 독일에서 못 누려 본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목표다. “득점에 관한 상들은 많이 받았잖아요. 우승 말고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핸드볼큰잔치 통산 최다 골 기록은 이번 대회에서 꼭 경신하고 싶어요. 그게 큰 동기부여가 되죠.”
윤경신은 13년간 핸드볼 큰 잔치를 비웠지만 최다 골 부문 역대2위다. 1위는 536골을 기록한 백상서(40·한체대여자감독). 인터뷰 다음날 충남대전에서, 윤경신은 보란 듯이 15골을 몰아넣었다. 이제, 통산 521골. 한국에서의 새로운 도전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윤경신은 오늘도 손때와 왁스가 묻은 낡은 핸드볼 공을 다시 한 번 움켜쥔다.
의정부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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