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은퇴… 굿바이 본즈!

입력 2009-12-12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어느 팀도 그를 원치 않는다” … 파란만장 본즈의 인생스토리
‘야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타자’ 배리 본즈(45)의 말로는 최악이었다. 본즈의 에이전트 제프 보리스는 11일(한국시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본즈의 약물 복용이 폭로된 ‘발코 스캔들’을 특종 보도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느 팀도 본즈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혀 마침내 은퇴를 기정사실화 했다. 이렇게 본즈는 공식 은퇴 발표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사라지게 됐고 불멸의 기록은 ‘미아’ 신세로 전락했다.


●천재

본즈는‘은수저를 물고’태어났다. 아버지는 30홈런-30도루를 5번이나 달성한 보비 본즈였고, 외가 친척에는 ‘미스터 옥토버’ 레지 잭슨이 있었다. 또 대부(代父)로서 배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윌리 메이스였다. 메이스를 존경한 본즈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피츠버그까지 24번을 달았다(메이스의 24번이 영구 결번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25번을 달았다. 25번은 아버지 보비의 넘버였다).

이런 환경에서 야구를 시작한 본즈의 재능은 ‘누구의 아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고교 3년 평균 타율이 0.404에 달했다. 졸업 후 빅리그 지명을 받았지만 계약금이 성에 안차 대학 진학을 택했다. 대학에서도 독보적이었고, 피츠버그는 4학년인 본즈를 1985년 6월 1차지명(전체 6번)해 계약했다. 입단 후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86년 5월 31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황제

본즈의 잠재력은 1990년부터 폭발했다. 1992년까지 3년 연속 보비 보니야와 ‘킬러 B’ 타선을 형성해 피츠버그에 지구 우승을 선사했고, 두 차례 30홈런-30도루와 MVP를 차지했다. 프리에이전트(FA)가 된 본즈는 동경하던 메이스의 팀,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적 첫 해인 1993년 MVP를 수상했고, 1996년 호세 칸세코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내셔널리그 최초)로 40홈런-4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1997년에는 400홈런-400도루를 정복했다. 2000년 본즈를 위한 구장이라는 퍼시픽 벨 파크의 개장과 함께 본즈의 홈런 기록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2001년 73홈런으로 마크 맥과이어(70홈런)를 넘어 단일시즌 기록을 세웠다. 71호 홈런은 10월 6일 박찬호(당시 LA 다저스)에게서 뽑아냈다(묘하게도 본즈는 2006년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깨는 715호 홈런을 당시 콜로라도 소속이던 김병현에게서 쳐냈다). 그해 본즈의 177볼넷(종전 루스의 170볼넷), 장타율 0.863(종전 루스의 0.847) 수치도 불멸로 평가받는다.

또 골드글러브 8회 수상의 본즈는 좌익수 수비를 개척했다는 찬사도 얻었다. 2001∼2004년 4년 연속을 포함해 MVP 7회 수상은 오직 본즈뿐이다.

2002년에는 우승에 실패했지만 월드시리즈 대활약으로 ‘정크 본드’란 빈정거림을 불식시켰고, 2003년 500홈런-500도루를 넘어섰다. 2005년부터 암운이 드리웠지만 2006년 700홈런 돌파에 이어 2007년 행크 애런(755홈런)을 넘어서 762홈런까지 정복했다.


●폭군

‘오만한 천재’는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했다. 대학시절 코치부터 고개를 저었고, 팀 동료들과 충돌도 끊이지 않았다. 단 한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했다. 언론과 날을 세웠다. 선수노조에도 가입하지 않아 보호받지 못했다. 궁지에 몰리자 측근들은 본즈를 배신했다. 약물의혹이 터지자 본즈는 회개 대신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의회청문회 위증 혐의로 연방대법원의 기소까지 몰렸다. 거짓에 민감한 여론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샌프란시스코와 계약이 종료되자 노쇠하고 미움 받는 본즈는 어느 팀도 받아주지 않는 철저한 외면을 감수해야 됐다. 2008∼2009년을 그렇게 쉬었고, 결국 에이전트마저 손을 들었다.

본즈는 떠나도 논란은 남는다. ‘그의 기록에는 주석을 달아야 된다. 스테로이드의 시대였다’는 비판 앞에서 그 빛나는 기록들은 시대의 재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