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스토리 IN 스포츠] 조성환-박안나 부부 공 맞아 멍든 얼굴로 첫 데이트 ㅋㅋ

입력 2010-01-23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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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조성환은 아내 박안나 씨(왼쪽)와 두 아들 영준(윗줄 가운데)·예준(아랫줄 가운데)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조성환 가족은 지난해 말 예준 군의 100일을 맞아 롯데 유니폼을 나란히 맞춰입고 단란한 기념 사진을 찍었다.사진제공|조성환

여자는 한 쪽이 움푹 파인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지훈련에서 돌아오기 바로 전 날, 공에 맞았다고 했다. 안 그래도 남자는 얼굴의 멍이 신경 쓰여 첫 데이트를 미룰까 망설이던 참.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귀국 다음날 달려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 남자가 물었다. “오늘 뭐 하고 싶어?” 여자가 되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말해봐.” 고민 끝에 돌아온 남자의 대답.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가보고 싶어. 너랑 손잡고 걸으면 좋겠다.” 여자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남자의 손을 꼭 쥐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심장박동. 남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손을 잡은 순간, 아내는 고생길로 접어든 거죠. 제가 한 번 잡은 손은 절대 안 놓거든요.”

2003 시즌. 롯데 조성환(34)이 타석에 들어설 때면 그룹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울려 퍼졌다. 아내 박안나(34) 씨와 처음으로 사랑을 확인했던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초등학교 때 싹을 틔운 마음이 마침내 꽃을 피우던 순간이었으니까.


○초등학교 동창회 재회…“반갑다 친구야!”

2000년 겨울. 롯데의 무명 선수 조성환은 지인을 만나러 동네 음식점을 찾았다. “혹시 성환이 아니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낯익은 얼굴이 수두룩했다. 그가 졸업한 백운초등학교 동창회였다. “합석해! 합석해!” 한 친구가 조성환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순간, 그녀를 발견했다. 박안나. 두 번이나 같은 반이었지만, 속으로 흠모했을 뿐 다가가지 못했던 소녀. 뽀얀 피부에 고운 인상이 여전했다. “어린 시절 선했던 모습에서 시간만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떨결에 동창들의 연락처 리스트를 받아오긴 했다. 그의 눈길은 자꾸만 박안나라는 이름 옆에 머물렀다.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먼저 울리기 전까지는. “고마운 마음뿐이었어요. 언젠가 내 진심이 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죠.” 그러다 떠난 전지훈련. 어쩌면 사랑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씨는 밸런타인데이에 커다란 초콜릿과 함께 자신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 때부터 조성환은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종교의 벽을 무너뜨린 사랑

시즌이 시작되자 제대로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 서울 원정경기 때만 만날 수 있었고, 그나마 조성환이 막내급 선수라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었다. 막 사랑을 시작한 남녀에게는 가혹했던 부산과 서울 간의 거리. 결국 두 사람은 연애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2001년 겨울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누군가와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이 사람밖에 없을 것 같다는 확신” 덕분이다.

걸림돌도 있었다. 조성환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박 씨는 목사의 딸이었다. 게다가 박 씨는 부산 땅 한 번 밟아본 적 없는 사람. 그래서 조성환은 결심했다. “변변찮은 야구선수였던 나에게 인생을 맡길 결심을 해줬다면, 나도 그녀를 위해 변하겠다고요. 제가 종교를 바꾸기로 했죠.” 성당이 아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도, ‘이 사람을 내게 보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는 의미였다.

조성환의 선택은 옳았다. 스무평 남짓한 전세 아파트에서 힘겨운 신혼생활을 시작한 박 씨는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부산에서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도 싫은 내색 없이 묵묵했다. 조성환은 “내가 이렇게 인터뷰에서 아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선수가 된 건, 그 때 내 손을 잡아준 아내 때문이었다”며 고마워했다.


○시련은 사랑을 단단하게 한다

‘병역비리’라는 고비가 닥친 건, 2005년의 일이다. 6개월 간 서울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까지 해야 했다. 그 때 박 씨는 어둠 속에 갇힌 남편을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면회를 왔다. 한참 자라고 있는 아들을 맡기고 온 남편은 매번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아내는 “당신이 있을 때는 운전이 서툴렀는데 여기 오가면서 나도 운전을 잘 하게 됐다”며 배시시 웃기만 했다. 아들 영준에게 자전거 한 대 사주지 못할 만큼 생활고에 시달릴 때도 눈치 한 번 준 적이 없다. 조성환은 그런 아내를 보면서 “긍정의 기운을 받았다”고 했다.

지난 시즌 중반, SK전에서 채병용의 공에 얼굴을 맞았을 때도 그랬다. 선수 생명조차 위기였던 그 순간, 그는 분노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아내를 통해서 많이 성숙해졌어요. 그 사람의 성품이 날 점점 변화시켜서 좋은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옛 광고 카피도 빈말이 아니다.


○아내에게 바친 골든글러브…“최고로 뿌듯”

힘든 날이 지난 후, 조성환 가족에게도 빛이 들었다. 2008년 조성환의 복귀와 함께 그도 롯데도 최고의 해를 맞았다. 그리고 생애 첫 골든글러브의 영광이 찾아왔다. 조성환은 시상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고생만 죽도록 해서 항상 미안했던 안나씨,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때가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라고 했다. “전 국민이 다 보는 자리에서 아내 이름을 외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고, 처음으로 그 사람이 ‘조성환이라는 남자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느꼈을 것 같아서”다.

조성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단연 가족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서는 스스로 야구를 잘 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조성환은 “언제까지 야구 인생이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나 때문에 가족이 행복한 날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내와 두 아들 영준·예준이 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힘이 난다”면서.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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