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경기] “대현아, 편히 잠들렴”… 눈물의 KS 우승

입력 2010-01-29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남들은 한번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는 우승을 수차례 경험한 이순철 전 LG 감독이지만 가장 각별한 우승으로 1988년 한국시리즈를 꼽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아끼는 후배를 떠나보낸 아픔을 우승으로 치유했기 때문이다.스포츠동아DB

이순철의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
대현이의 갑작스런 교통사고 죽음, 조수석의 난 멀쩡히 살아있는데…
타이거즈에서 숱한 정상 맛봤지만 그해엔 절박하게 우승하고 싶었다
동열이 부상에도 해낸 또하나의 V…그 마음이 하늘에서도 통했나봐요
해태 타이거즈가 한두 번 우승했는가? 남들은 1988년 한국시리즈 우승도 해태의 V9중 하나로만 알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각별하다. 우승을 결정짓는 한국시리즈 6차전(10월26일 잠실 빙그레전)은 내 생애 최고의 경기다. 그 경기에서 나는 1번 타자로 나와 3타수 무안타였다. 보내기 번트 1개와 고의4구 1개에 1득점이 전부였다. 시리즈 MVP도 내가 아니었다. 6차전 완투승(4-1)을 포함해 에이스 선동열의 손가락 물집 부상을 완벽히 메워준 문희수가 MVP였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경기가 제일 먼저 떠올랐을까. 그때만큼은 왜 그리도 절박하게 우승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까. 그 녀석이 생각났으니까….


○무덤까지 갖고 들어갈 기억, 1988년 8월27일

자동차 조수석에 의자를 젖히고 누워 있었던 기억이 난다. 생(生)과 사(死)의 운명이 엇갈린 장소는 새벽 천안삼거리 휴게소 부근이었다. 덤프트럭과 충돌했다. 그 녀석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살았다.

왜 그날 그리도 서둘러서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가려 했을까? 이젠 기억도 안 난다. 어째선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가 ‘가지 말자’고 말렸던 기억만 남는다. 전반기를 마치고 얻은 짧은 휴가. 아마 둘 다 그땐 혈기왕성한 총각이어서 자리가 생기면 마다하지 않았으리라.

해태 우완투수 김대현. 녀석은 1년 후배였다. 동향에다 나를 유독 따랐다. 1986년 입단해 1987년 9승을 했고 1988년엔 전반기에만 7승을 거뒀다. 나도 전반기까지 최고 성적을 올렸다.

그래서 후반기 개막을 앞두고 마지막 회포를 풀러 우리는 함께 있었으리라. 그 녀석이 운전했고, 내가 옆에 탔는데 깜빡 졸았다. 아마 녀석도 졸음운전이 아닐까 생각은 든다. 안 그랬다면 주차중인 트럭과 그렇게 부닥치지는 않았을 터이니…. 옆에 있는 후배는 죽었는데 나는 찰과상만 입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정밀진단 결과 신기하리만치 멀쩡했다. 그러나 병원에 머물렀다. 정신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기뻐할 수 없었던 기적. 그 후유증으로 후반기 몇 경기쯤 결장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생각했다. 남은 인생, 내가 대현이 몫까지 살아야 된다고.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낸 뒤 대현이 유골이 뿌려진 곳을 다시 찾겠다고.

 고(故) 김대현의 해태 시절 역투 장면. 1988년 26세의 나이로 숨졌지만 해태맨들은 그를 잊지 못한다.스포츠동아DB



○타이거즈 정신의 증명, 1988년 10월26일

해태는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상대는 빙그레. 적잖은 사람들이 해태의 열세를 점쳤다. 승부 세계에 사는 사람의 직감이랄까, 과거 2년과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한국시리즈가 되리란 예감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팀의 절대적 에이스인 선동열(현 삼성 감독)이 1차전 등판 직후 손가락 물집이 잡혔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하필 왜 이 시국에…. 무조건 숨겨야 될 극비였다. 실전에 못 나가도 선동열이 유니폼 입고 러닝만 해도 상대 팀은 긴장하니까.

여기서 김응룡 감독(현 삼성 사장)이 꺼낸 카드는 문희수였다. 김정수 이상윤이 아니라. 의외라면 의외인 인선이었는데 문희수는 기가 막히게 던졌다. 한국시리즈에서 방어율 0.46, 2승 1세이브로 3차전과 6차전을 책임졌다. 아무리 우리가 감추려 해도 선동열의 등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들통 날수밖에 없는 비밀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빙그레가 눈치 챈 것은 3차전 이후였다. 우리가 3연승을 해버린 뒤였다. 승기가 왔다고 판단한 우리는 잠실에서 우승하자는 마음에 4차전을 내주다시피 했다.

그런데 잠실로 올라와서 5차전까지 져버렸다. 원래 해태는 경기를 마치면 선수들에게 자율을 줬는데 그땐 어찌된 일인지 코치진이 야간 통금을 시켰다. 이것이 안 좋게 작용하자 6차전을 앞두곤 다시 자율로 전환했고, 선수들도 다소나마 부담을 잊을 수 있었던 듯싶다.

6차전은 쉽게 이긴 기억만 난다. 문희수가 워낙 잘 던졌으니까. 이후 우리 해태는 1989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을 해냈지만 그때만큼 우승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우승을 이루고 선수단은 대현이의 유골이 뿌려진 곳을 찾아 국화꽃을 바쳤다.


○타이거즈 정신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성적은 10전 10승. 해태는 1983년을 시초로 1986∼1989년 4년 연속 우승을 달성해 왕조를 건국했다. 이후 1991년, 1993년, 1996∼1997년까지 해태는 불패였다. 그 해태를 계승한 KIA는 한국시리즈에 한번도 오르지 못하다 비로소 2009년 V10을 채웠다. 한국시리즈만 들어가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용맹한 타이거즈의 비결에 대해 이순철 위원은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선후배나 동기로 인연을 이어온 전라남북도 동향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어서 역경이 닥쳐올수록 동료를 믿고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스타라고 함부로 튀지 않고 팀을 먼저 생각했다. 또 팀을 잡아주는 리더가 늘 존재했다”라고 풀이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