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원년 개막전 끝내기 만루포…이선희에게 늘 미안했다

입력 2012-07-1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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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개막전에서 MBC 청룡 유니폼을 입고 삼성 이선희를 상대로 연장 10회 끝내기 만루홈런을 때려낸 주인공. 현재 설악고 야구부를 이끌고 있는 이종도 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화려했던 선수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원|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n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히어로…설악고 감독


연장 만루찬스…힘 빠진 이선희 공
맞는 순간 ‘총알 타구’ 끝내기 직감
그 생각만 하면 엔도르핀이 팍팍!

서른에 생긴 프로야구 고민끝 선택
MBC·OB 6년 뛰고 미련없이 은퇴

2년전 췌담도와 싸워 9시간 대수술
속초서 요양하다 설악고 감독 인연
요즘 TV보면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그 홈런이 없었다면 한국프로야구도 없었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 연장 10회 터진 끝내기 만루홈런. 이종도(60). 나이 서른에 프로야구에 뛰어들어 6년간 화끈하게 선수생활을 했다. 이후 지도자로, 최초의 프로 출신 해설자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2년 전 대수술을 받았지만 끝내기 홈런의 남자답게 거뜬히 회복했다. 지금은 속초 설악고 감독을 맡아 고교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직도 그날의 홈런을 생각하면 몸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는다고 했다.


○1982년 서른의 나이에 프로야구를 선택하다!

1982년 이 땅에 프로야구가 생겼다. 제일은행 대리 1년차였다. 나이 서른. 실업선수 생활을 접으려고 할 때였다. 고민했다. 과연 가도 되나? 주위에 진로를 물었다. “결론은 본인이 내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와 상의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아요.” 결국 MBC 청룡의 선수가 됐다. 계약금 1850만원, 연봉 2400만원. 프로선수가 된지 두 달 만에 전세로 살던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샀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프로에 가면서 10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백인천과 MBC 청룡

동대문구장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백인천 선수 겸 감독은 달랐다. 마흔 살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열정적이었다. 선수들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프로야구에 대한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접했다. “훈련이 지독했다. 강릉∼진해로 이어지는 훈련 동안 백 감독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배운 노하우를 많이 알려줬다. ‘프로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야구를 생각해야 한다’며 침대에서 복근, 배근 운동을 하라고 했다. 아침 산책 때는 배트를 들고 다니면서 팔 근육을 키우고 몸을 풀게 했다. 백 감독의 체력은 놀라웠다. 달리기부터 빠지지 않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열정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배우려고 했다.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백 감독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끝나면 완벽하게 쉬게 해줬다. 아마야구에선 없었던 사흘 훈련, 하루 휴식을 처음 경험했다.” MBC는 그 덕분에 다른 어느 구단보다 일찍 프로의식을 몸으로 배웠다.


○운명의 개막전 스타는 유승안?

백인천 감독은 유승안을 좋아했다. 경동고 후배인데다 방망이도 잘 쳤다. “한국에도 저렇게 치는 선수가 있냐”며 놀랐다. 백 감독의 유승안 사랑은 개막전 스타팅 라인업에 그대로 드러났다. 3번 김용윤(이후 김바위로 개명)∼4번 유승안∼5번 백인천∼6번 이종도였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구장. 어수선했다. “구장은 눈에 익어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행사가 열리는 동안 뭔가 어색한 분위기였다. 경호원들은 덕아웃에 둔 배트에 놀랐다. 흉기라고 생각해 치우라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 때문이었다. 시구 때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움직였다.”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하고 경기에 들어갔다. 초반은 삼성 분위기. 선수 대부분이 국가대표 출신. 점수차가 크게 벌어지자 삼성 서영무 감독(작고)은 “개막전인데 너무 차이가 나면 안 되니까 살살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삼성이 느슨하게 경기를 하자 MBC가 따라붙었다. 유승안이 동점 3점홈런을 치면서 경기는 드라마틱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실질적으로 그날의 히어로는 유승안이었다. 10회 무사 만루 0-3서 높을 볼을 쳐서 투수땅볼이 되지 않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대기타석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내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삼성은 백인천을 거르고 2사 만루서 이종도와 대결을 택했다. “백 감독이 1루로 걸어 나가면서 손으로 큰 공 모양의 사인을 줬다. 자기 공을 치라는 사인이었다. 훈련 때 많이 했던 동작이었다. 이선희는 5∼6번이나 불펜에서 몸을 풀고 난 뒤인지 어깨가 식어서 공에 힘이 없었다.” 0-2서 운명의 공이 왔다. “맞는 순간 경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총알같이 날아갔지만 스탠드로 넘어갈 줄은 몰랐다. 1루를 돌아 3루를 보면서 홈런인지 알았다. 3루의 유백만 코치가 포옹을 했다. 백 감독도 홈에서 나를 반겨줬다. 동료들이 나와서 등을 두드려주는 장면들이 부분부분 기억난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엔도르핀이 솟는다.” 개막전에는 MVP 상품도 있었다. 250CC 스즈키 오토바이. “타고 다닐 일도 없고 해서 팔았다. 유승안은 그 뒤 나만 보면 ‘형, 바퀴 하나는 내꺼야’라고 했다.” 그 홈런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이종도는 지금도 이선희만 보면 그 때의 홈런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느낀다.

이종도(오른쪽)가 원년 개막전 연장 10회 끝내기 만루홈런을 친 뒤 3루에 있던 유백만 코치와 얼싸 안고 기뻐하는 모습. 스포츠동아DB




○이종도와 홈런의 추억

유난히 홈런과 좋은 인연을 많이 맺었다. 제일은행 시절인 1976년 4월 7일 실업야구 통산 1000호 홈런의 주인공이었다. 4연타수 홈런 기록도 세웠다. 사구로 나간 2번타자 박준영을 빼고 1번 이종도에 이어 3번 김우열∼4번 김차열∼5번 김태석이 연속타자 홈런을 뽑아냈다. 중앙고 시절에는 봉황대기 때 1회초 무사만루서 청주 세광고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뽑아냈다. 고려대 1학년 때는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9회 2사 후 극적인 동점 홈런을 뽑아냈다. “0-1로 뒤진 9회 투아웃에서였다. 투수는 유남호였다. 이전 타석까지 삼진을 3번이나 당했다. 타석에 들어서려는데 다른 선수가 스윙하는 것이 보였다. 교체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고광적 감독이 부르더니 ‘종도야, 니 스윙하고 들어온나’라고 했다. 카운트는 기억나지 않지만 몸쪽 공이었다.” 극적인 동점 홈런 장면은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고려대 교내방송을 통해 반복됐다.


○미련은 없다! 선수 은퇴

MBC에서 3년, OB에서 3년, 6년간 뛴 뒤 은퇴했다. “나이 서른여섯이 되니까 체력이 달렸다. 억지로 후배들에게 밀려나면 아쉬움이 남겠지만, 스스로 체력을 알고 물러났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이후 프로야구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해설자가 됐다. MBC 라디오에서였다.

1988년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으로 가면서 불렀다. 중학교 이후 모든 팀에서 주장을 했을 정도로 리더십이 뛰어나고 후배들이 잘 따르던 그를 인정했다. 태평양∼LG∼쌍방울에서 코치를 했고, 감독대행도 했다. 2000년부터 7년간 고려대에서 감독을 했다. 후배를 위해 용퇴한 뒤 방송해설도 했고, 고교팀 인스트럭터도 했다.

인생의 고비도 있었다. 2010년 췌담도라는 병마와 싸웠다. 담즙이 나오는 길이 종양에 막히는 증세였다. 황달이라는 전조증세가 와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9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몸무게가 13kg이나 줄기도 했지만, 공기 좋고 물 좋은 속초에서 요양하면서 회복됐다. 설악고의 요청으로 다시 감독이 된지 7개월째. 18명의 선수와 함께 지낸다. 매일 30분씩 배팅볼을 던질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요즘도 TV로 프로야구를 보면 자랑스러움과 함께 기쁨이 찾아온다는 그는 후배들에게 이 말을 강조했다.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선이 굵은 사람이 되자. 동업자 정신을 가지고 내면을 더욱 키우기 바란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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