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희, 공부가 하고 싶었던 배구선수…‘FIVB 국제심판 4호’ 됐다

입력 2014-03-0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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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희 심판이 오랜 도전 끝에 국내에서 역대 4번째로 국제배구연맹(FIVB) 국제심판 자격증을 땄다. FIVB 이사회 승인을 받은 뒤 국제여자배구 결승라운드 주심으로 코트에 나선다. 4일 인삼공사-GS칼텍스전 주심을 보고 있는 강 심판. 대전|김종원 기자 won@donga.com트위터@beanjjun

국내 4번째 FIVB 국제심판
강주희 ‘용감한 도전’

화려한 선수생활…22세 은퇴 선언
감독 만류에 소주 40병과 싸웠다

2년 준비 체육교육학과 수석 입학
대학때 딴 자격증 인연 심판의 길
5년간 누적점수 만든 후 꿈 이뤄


한 국배구연맹(KOVO) 강주희(43) 심판이 국내에서 4번째로 국제배구연맹(FIVB) 국제심판 자격증을 땄다. 한국은 조영호 전 한양대 체육학과장을 시작으로 안종택∼김건태 심판이 뒤를 이었으나 2010년 김 심판이 정년으로 FIVB국제심판에서 은퇴한 뒤 국제무대 심판을 배출하지 못했다. 지난해까지 FIVB국제심판은 15명. 여성은 스페인의 마리아 로드리게스 한 명 뿐이다. 다가올 FIVB 이사회를 통해 이번 시즌 인원과 운영방침이 확정된다. 강 심판은 이후 FIVB가 주최하는 국제여자배구대회의 결승라운드에 주심으로 나선다. V리그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눈초리로 판정을 내리는 강 심판은 자신을 위해 꾸준히 투자하고 가치를 높여 전 세계 수많은 심판들이 꿈꾸는 자리에 올라섰다.


● 아버지의 강요로 시작된 배구선수생활

대구 삼덕초등학교 5학년 때 배구를 시작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강요 때문이다. 오빠와 언니가 테니스, 배구를 시작했지만 도중에 그만뒀다. 막내딸도 배구가 싫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 꾹 참고 했다. 남들보다 키가 컸다. 중학교 1학년 때 186cm. 한국배구가 꿈꾸던 미래였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유소년꿈나무를 발굴하던 때였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꿈나무가 됐다. 1987년부터 청소년대표 1991년부터 국가대표를 했다. 두 대표를 동시에 하던 때도 있었다. 1988년 6월 실업팀 효성여자배구단에 입단했다. 동기들이 천만원대 계약금을 받을 때 억대를 받았다. 그만큼 기량이 좋았고 기대도 컸다. 센터이면서 백어택까지 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팀 공격의 대부분을 했다.

화려했던 선수생활은 짧았다. 고작 4년간 뛴 뒤 22살의 나이에 은퇴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다. 실업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1년 내내 배구를 하다보니 지쳤다. 그 나이 또래가 경험해야 할 다양한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때마침 효성배구단은 불미스러운 사고로 혼란스러울 때였다. 기회였다. 배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 소주 40병을 마시고 다음날 은퇴경기를 하다

감독은 만류했다. 숙소 앞에서 오후 6시에 만났다.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강주희는 버텼다. 대화는 다음 날 오전 6시에 끝났다. 소주가 40병 쌓여 있었다. 평소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오기였다. 감독이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길 원했지만 끝내 그 얘기는 듣지 못했다. 비몽사몽간에 경기에 출전했다. 넘어지면서도 모든 공을 다 받아냈다. 경기 뒤 병원에 후송됐다. 탈이 났다. 강주희의 선수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

1992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을 봐서 일반학생이 되고 싶었다. 2년을 준비했다.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사범대 체육교육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서울에 위치한 학교를 가고 싶었으나 배구팀이 있는 학교 모두가 입학을 거절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영어실력의 부족을 절감했다. 스트레스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해외연수를 갔다.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스포츠심리학)까지 땄다. 지도교수가 일본 쓰쿠바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쪽의 은사를 추천했다. 2년간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계속 공부를 했다. 실업팀에 입단할 때 받은 돈으로 사둔 아파트와 저금을 모두 깨서 공부에 투자했다. 모아둔 돈도 바닥이 났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해결했다. 영어가 여전히 문제여서 아버지의 보험금을 깨서 500만원을 들고 다시 미국으로 갔다. 한달 만에야 깨달음이 왔다. 다양한 외국어를 편하게 다루는 능력은 국제심판에게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 우연찮게 시작한 심판 천직이 되다

1994년 대학 1학년 때 심판 자격증을 땄다. 국가대표 출신이어서 A급을 받았다. 사실상 장롱면허였다. 1998년 대구 경북지역에서 슈퍼리그가 열렸다. 협회에서 자격증 소지자를 찾다가 강주희를 불렀다. 선심으로 시작했다. 마침 FIVB가 각국에 여자심판을 육성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대표팀 출신으로 학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에게는 우선권을 준다고 했다. 박승수 당시 심판위원장(현 9인제배구협회장)이 나섰다. 대표팀 때 사제지간의 인연도 작용했다. 정식으로 심판이 되라고 했다. 은인이었다. 1999년 심판의 길에 들어섰다. 첫 경기에 부심으로 나갔다. 송원여고와 신명여고 경기였는데 무식하다면 용감하다고 사고를 쳤다. 심판이 결정해야 할 판정을 부심이 내렸다. 노카운트가 됐다. 3년간 모든 경기에 출전하다시피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 심판은 선택받는 외로운 자리

처음 시작하면서 꿈을 세웠다. FIVB국제심판이었다. 그 길을 향해 한걸음 한 걸음 나갔다. 차츰 국제대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국제심판의 조건은 까다로웠다. 일정 수준 이상의 대회에서 팽팽했던 경기만을 대상으로 심판의 능력을 감독관이 평가한다. 감독관도 매번 달라야한다. 그렇게 해서 받은 점수를 5년간 누적해 국제심판에 도전할 자격을 준다.

전 세계 심판은 1∼2월과 6월이 되면 스트레스가 심하다. FIVB로부터 심판배정을 통고받는 때다. “물위의 백조는 우아해 보이지만 물 밑으로는 엄청 힘들게 발을 움직이는 꼴“이라며 선택을 기다리는 자신을 표현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애태우고 기회가 되면 능력을 보여준 끝에 마침내 자격증을 땄다. “이제는 심판배정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혹시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하는 후배가 있다면 지금 내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공부하고 스스로에게 많은 투자를 해서 가치를 높이는 일부터 당장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강주희의 용감한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주희 심판. 대전|김종원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n



● 강주희 심판 프로필

생년월일: 1971년 5월 25일
학력: 대구 삼덕초- 경복여중- 경북여상-대구가톨릭대-동대학원(석/박사=스포츠심리)
현역포지션: 센터
선수경력: 1988.6∼1992.4 효성그룹여자배구단
대표경력: 1987∼1991 청소년대표/ 1989∼1991 성인대표
리그경력: 133경기
국제경력: 118경기(그랑프리, 월드컵, 그랜드챔피언스컵, 세계주니어선수권)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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