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획] 안효리 “똥말 와도 악착같이 탔죠”… 손지영 “물에 빠져도 기어이 완주”

입력 2015-01-16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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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남자와 성대결을 벌이는 직업을 가진 안효리(왼쪽)와 손지영이 독자들에게 하트를 날리고 있다. 이날 대담은 겨울 비시즌을 맞은 손지영이 안효리가 훈련 중인 경마공원을 찾아 이뤄졌다. 뒤로 보이는 것이 경마 경주로. 임민환 기자 minani84@donga.com 트위터 @minani84

■ 경마·경정서 남자들과 맞짱뜨는 여전사들|경마 안효리·경정 손지영

경마와 경정은 남녀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보기 드문 스포츠 종목이다. 근력, 체력, 순발력 등에서 크게 차이 나는 남자와 여자가 맞짱을 뜨는 건 말과 보트가 사람보다 승패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신체능력에서 앞선 남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게 두 종목 전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뒤엎은 파워우먼들이 있다. 지난해 남자를 포함한 160여명의 경정 선수 중 상금 2위를 차지한 손지영(30)과 대담한 말몰이로 경마장에 여풍을 일으키고 있는 안효리(26)가 주인공이다. 따로 또 같이 ‘성벽(性壁)’을 허물고 있는 두 여자 선수가 만나 직업의 애환을 털어놓았다.


경마장 여풍 주역 안효리

마주들 여자기수 꺼려 데뷔 초 출전도 어려웠죠
말 탈 땐 여자란 사실 잊어…‘기수 안효리’일 뿐
출발 전 긴장감·골인 때 쾌감 말로 표현 못하죠

지난해 상금 2위 손지영

정신력까지 남자선수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
보트 전복으로 골절·뇌진탕…한때 트라우마로
경마·경정도 스포츠…색안경 끼고 보면 서운해


● 여자 선수가 아닌 그냥 선수로 불리고 싶다


-여전사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직접 만나보니 두 분 다 귀여운 외모의 천생 여자네요.


손지영(이하 지영) : 귀여운 여자? 왠지 어색하고 불편한데요. 성대결 종목 특성상 오랫동안 여자선수가 아닌 그냥 경정선수로 불렸기 때문이겠죠.


안효리(이하 효리) :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말을 탈 땐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요. ‘여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 기수에게 지는 거야’라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듣기도 했고. 기수 면접 때도 ‘여자 기수로서 장점이 뭐냐’는 질문에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기수 안효리의 장점을 말하겠다’고 했어요.


지영 : 그래도 효리씨는 얼굴, 목소리 뿐 아니라 이름도 예쁜 걸요.


효리 : 이름 때문에 놀림 많이 받아요. ‘효리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만나보니 효리가 아니네. 그래서 네가 안!효리구나’ 이런 식으로.(일동 폭소)


-어떤 계기로 이 특별한 일을 시작하게 됐나요.


지영 : 중학교 2학년 때 사이클을 시작해 인천시청에서 실업선수로 뛰었어요. 그런데 체격이 작다보니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았죠. 선수생명도 짧아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여자 경정 선수를 뽑는다기에 도전하게 됐어요. 단점이던 작은 체구가 모터보트 레이스 경정에선 유리하다는 얘기에 힘을 얻었어요. 실린 짐이 가벼워야 배가 잘 나가는 이치죠.


효리 : 어릴 때 집에서 강아지, 닭, 오리 등을 키워 동물을 좋아했어요. 그런 나에게 아버지가 말 특성화 학교인 한국마사고 진학을 권유했어요. 구경삼아 그 학교에 가게 됐는데, 말을 보는 순간 신기할 정도로 가슴이 막 뛰는 거예요. 마사고 입학 후 승마수업에서 말 타는 걸 배웠고, 동기와 선배들의 영향으로 기수를 꿈꾸게 되었어요.


● “깨어보니 병원”…사선을 넘나든 부상의 기억


-두 종목 다 보기만 해도 위험하던데.


효리 : 기수후보생 합숙 시절 훈련 중 말에서 떨어져 어깨가 부러지고 팔꿈치 신경이 절단됐어요. 1년간 치료를 받고 복학해 후배들과 교육을 받는데, 이번엔 걸을 때 갑자기 다리가 푹푹 꺼지는 거예요. 의사가 MRI를 보더니 ‘완전 할머니 무릎이네’라고 하더군요. 다리를 구부리고 말을 타다 보니 무릎 연골이 다 닳아버린 거죠. 병원에선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기수를 하려고 재활을 선택했어요.


지영 : 나도 부상으로 몇 번 죽음문턱을 다녀왔어요. 경정은 보트가 전복될 때 가장 위험해요. 물에 빠졌다 떠오르는 순간 뒤에서 달려오는 보트가 덮치면 크게 다치죠. (프로)펠러에 몸이 닿게 되면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2007년 신인 때 다른 배 펠러에 팔꿈치 뼈가 부러져 10개월간 병원신세를 졌죠. 2010년에는 보트에 부딪혀 튕겨져 나간 후 구조물에 또 부딪히며 정신을 잃었어요. 눈을 뜨니 병원이었는데 뇌진탕 때문에 계속 토하면서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7개월을 쉬고 복귀했는데 물을 보는 순간 공포감이 살아나더군요.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게 힘들었어요.


효리 : 경마 역시 정말 위험해요. 말을 훈련시킬 때도 사고가 끊이지 않아 거의 매일 앰뷸런스가 경마공원에 출동해요. 경주 중엔 말에서 떨어지면 다른 말에 밟혀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요. 나도 지난해 1월 낙마 후 정신을 잃은 적이 있어요.


-그렇게 위험한데 포기할 수 없는 직업의 매력은.


효리 : 일단 말과 교감하는 게 좋아요. 말 위에 있을 때 내 다리를 타고 말의 심장이 뛰는 느낌이 전해져요. 발주대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릴 때의 긴장감, 말과 한 몸처럼 달려 환호 속에서 1등으로 골인할 때의 쾌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지영 : 남자선수를 이길 때 성취감이 커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정년이 없다는 점도 장점이에요. 위험한 것만 빼면 여자직업으로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 “여자는 안돼”…남자보다 넘기 힘들었던 편견의 벽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1년에 얼마나 버나요.


효리 : (머뭇거리며)구체적으로 밝히긴 곤란한데…. (기자가 ‘억대 연봉이냐’고 묻자 안 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 선수가 지난해 번 상금 1억2500만원은 경정 홈피에 공개돼 있죠. 상금순위 2위인데, 남자들을 압도하는 비결이 뭐죠.


지영 : 조종술은 기본이고 모터 정비, 펠러 가공에 정신력까지 남자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한번은 경기 중 물에 빠졌는데, 보트를 붙잡고 올라타서 꼴등이었지만 완주를 했어요. 지켜보던 선수들이 ‘너같이 독한 X은 처음 본다’며 고개를 젓더군요.


효리 : 경마도 여자기수는 독기가 없으면 버틸 수가 없어요. 일단 기회 자체가 적다는 게 가장 힘들어요. 마주들이 여자 기수를 탐탁지 않게 여겨 웬만하면 자기 말에 남자를 태우려고 해요. 아무리 깡다구 있게 말을 몰아도 데뷔 초엔 1주일에 1번 출전도 어려웠어요. 초기 여자 선배들은 마방에 갔을 때 ‘재수 없다. 소금 뿌려라’는 말까지 들었다네요.


지영 : 헐….


효리 : 좋은 말은 언감생심이고, ‘똥말’이 와도 악착같이 탔어요. 성적이 나쁘면 다음 기회가 안 올 것 같았거든요. 전체 기수 중 훈련량 2등일 만큼 경주마 새벽 훈련도 열심히 시켰고요. 저는 훈련 후에 말도 직접 씻겼어요. 이런 노력 덕분인지 조금씩 출전기회가 늘어 이젠 1주일에 10번은 뛰어요. 하지만 아직 힘든 여자선배들이 많아요. 여자기수에게 말 탈 기회 많이 주라고 기사에 꼭 써주세요.


지영 : 경정은 추첨을 통해 보트와 모터를 배정받기 때문에 우린 ‘복불복’이죠.


-돈을 거는 베팅 스포츠 종사자인데.


지영 : ‘경정? 도박이잖아’라는 얘기를 들으면 정말 서운해요. 야구, 축구 등 다른 종목도 스포츠토토를 통해 베팅을 하는데 유독 경마, 경정, 경륜만 색안경을 끼고 봐요.


효리 : 돈 잃은 고객한테 욕이란 욕은 다 들어본 것 같아요. 처음엔 많이 속상했는데, 지금은 ‘감사합니다’, ‘더 잘 할게요’라며 웃고 돌아섭니다.


-서로에게 응원 한마디씩.


효리 : 기수 후보생 때 경정장에 견학을 간 적이 있었어요. 보트 운행 폼이 승마의 몽키자세와 비슷해 친근감이 들었어요. 부상 없이 승승장구했으면 좋겠어요.


지영 : 공통점이 많아선지 처음 만났지만 정이 많이 들었네요. 따뜻해지면 미사리 경정장에 놀러오세요.


-상대 경기장에 가면 서로에게 베팅할 건가요.


지영·효리 : (손을 맞잡으며) 당연하죠. 의리!

이날 손지영은 남자친구를 대동했다. 같은 경정선수인 지용민(29)과 지난해 7월부터 교제해 올 봄 결혼을 약속했다고 스포츠동아에 처음 털어놓았다. 안효리의 남친도 기수다. 부경경마공원에서 활동 중인 김현중 기수(26)와 마사고 2학년 때부터 9년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남친이 같은 종목이라 서로 조언과 격려를 해줄 수 있어 좋지만, 위험한 걸 아니까 부상이 늘 걱정이다”며 둘은 공감했다. 각자의 남자친구가 동향(대전시 관저동) 출신임을 확인하자, 곧바로 2대2 술자리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이런 거침없는 친화력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던 금녀의 벽을 허물 수 있었을 것이다. 치열한 성전(性戰)에서 그녀들의 승전보가 한 동안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경마 안효리는?

▲1989년 전북 전주 출생
▲160cm·48kg
▲완산서초- 효정중-한국마사고-원광대 경찰행정학부(휴학중)
▲2012년 6월 데뷔
▲312회 출전·17승·2위 16회·3위 26회(2014년 성적)

● 경정 손지영은?

▲1985년 경기도 포천 출생
▲155cm·49kg
▲외북초-삼성중-의정부여고-성화대-인천시청
▲2007년 2월 데뷔
▲78회 출전·30승·2위 16회·3위 12회(2014년 성적)

김재학 기자 ajapt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ajap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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